제2회 해미백일장 해미용기상 유영숙 님 수상작

80세에 대장정을 시작한 모세를 롤모델로 삼고 있던 남편은 80부터가 진짜 인생의 길이라고 했던가. 그런 그가 82세가 되어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뒤 평생을 즐기고 붙잡았던 모든 일을 내려놓았다. /유영숙
80세에 대장정을 시작한 모세를 롤모델로 삼고 있던 남편은 80부터가 진짜 인생의 길이라고 했던가. 그런 그가 82세가 되어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뒤 평생을 즐기고 붙잡았던 모든 일을 내려놓았다. /유영숙

보호자분, 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예. 배우자입니다."

나는 88세의 남편을 돌보는 가족 요양 보호사이다. 80세에 대장정을 시작한 모세를 롤모델로 삼고 있던 남편은 80부터가 진짜 인생의 길이라고 했던가. 그런 그가 82세가 되어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뒤 평생을 즐기고 붙잡았던 모든 일을 내려놓았다.

매일 쏟아지는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 처리로 바쁘던 남편은 시간이 흘러 흘러 요즘은 습관적으로 가족과 형제들 그리고 몇몇 지인들에게 자신의 일상을 열심히 알려주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이다. 이메일을 열어야 할지 카톡을 열어야 할지 워드를 열어야 할지 몰라 내게 어떤 걸 열어야 하냐고 묻곤 한다.

반복되는 질문이 어이없어 때로는 퉁명스럽게 때로는 불쌍한 마음으로 알려주곤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남편이 불과 몇 년 전의 남편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나의 가슴 속까지 전달되는 어떤 덩어리가 훅하고 들어온다.

나는 운전 면허증이 있음에도 늘 남편의 조수석을 지켜왔었다. 남편은 운전해서 나를 태우고 가는 것이 자기의 할 일이고 그 일은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 87살에 그는 내 조수석에 앉아 주치의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원장님은 늘 우릴 보고 누가 운전하셨습니까? 하신다. 내가 "오늘은 제가요" 하고 대답한다.

남편의 일과는 새벽에 일어나 문밖에 배달된 코리아헤럴드를 가져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밤새 찍어낸 따끈따끈한 소식을 보통 한 시간가량 훑어보는 것이 그의 습관이자 낙이었다. 어느 날부터인지 신문에 관심이 없는 나는 택배를 받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 읽어줄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굴러다니는 신문을 문밖에서 발견하곤 한다. 이 또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를 열면 커피믹스 한 잔이 놓여있다. 남편이 먼저 일어나 아침을 먹고 나를 위해 타 놓은 커피다. 그 달달하고 차가운 커피가 입 속으로 들어올 때 느끼는 기분은 하루를 살아야 하는 매임에서 잠시 나를 놓아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요즘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 안을 눈 씻고 찾아도 커피는 보이지 않는다. 이내 나는 시계를 보고 아직도 자는 남편을 위해 부지런히 아침 준비를 한다. 약을 먹게 하기 위해서다.

한동안 나는 남편이 약 먹는 일에 많은 스트레스를 겪었다. 내 약도 못 챙기는 내가 남의 약을 챙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그러다가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의 7일 치의 약을 약통에 채워 놓았다. 하루 세 칸씩 7개의 약통이 색깔 별로 되어 있고 각각 요일을 써놓았다.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정말 생각이 안 날 때가 많은데 이 약통은 매우 편리했다.

약은 남편이 알아서 먹고 나는 약을 채워주고 가끔 잔소리할 뿐 그래도 거의 혼자서 해결했다. 그러나 요즘 그 효자 약통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남편이 약 먹는 것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약 안 먹는다고 소리 지르다 이제는 끼니마다 내가 챙기고 있다. 여전히 식사 전에 먹는 약은 얼마나 챙겨주기 힘든지 고역이다.

의사를 만나기 위해 병원에 가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우리 부부는 남편이 나보다 병원에 훨씬 자주 간다. 그럼에도 나이보다 건강하다고 의사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말씀하신다.

80kg을 넘나들었던 몸무게는 빠지고 빠져서 지금은 52kg이 되었다. 큰 질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전 대장용종 제거 후 당뇨로 시작해서 피부암으로 두 번 입원 수술, 탈장 수술 지금은 췌장 담도에 돌을 제거하는 내시경 시술 등 그 외에도 군데군데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들로 인해 수술과 시술을 번갈아 가며 받는 중증 환자가 되었다.

신경외과 이비인후과 소화기 내과 심장 내과 피부과 치매 예방센터와 이제는 노년내과까지 섭렵하며 다녀야 한다. 남편의 몸은 근래 일 년 사이에 15kg 이상이 빠져나갔다. 지금 그는 췌장 담도 내시경으로 협착된 부분에 스텐트를 넣는 시술을 하고 입원 중이다. 갑자기 빠져나간 체중의 원인을 찾기 위함이다.

김포 호수공원은 유일한 이웃 친구 푸드 트럭 박 사장님과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친구 성우가 언제나 가면 있기에 남편은 늘 그곳에 가고 싶어 한다. 말이 걷기 운동이지 나에게는 천천히 걷는 것이 속도를 내어 가속을 받아 걷는 것의 몇 배는 힘이 들고 다리가 아프다.

남편의 몸 상태에 따라 전에는 다섯 혹은 여섯 바퀴를 돌았지만 이젠 한 바퀴도 힘들어 군데군데 놓인 의자에서 쉬곤 한다. 또 다른 날 우리는 걸어서 가끔 이마트 스타벅스에서 커피도 마시고 작은 물건이라도 사서 함께 들고 오곤 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이마트에서 집에 올 때면 남편은 '아직도 집이 머네" 하더니 이제는 걸어서 이마트에 가는 것은 생각 속에서 접은 지 오래다. 예전에 나는 다리가 긴 남편이랑 산책할 때면 종종걸음으로 계속 뛰듯 해야 속도를 겨우 맞춰 함께 갈 수가 있었다.

언젠가 보니 남편의 걸음걸이가 나와 속도가 맞더니 점점 나보다 늦어지고 그리고는 지팡이가 없이는 걷기가 힘들어 결국에 우리는 부득불 의료기기 센터에서 성인용 보행기를 주문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아니 날이 갈수록 변하는 남편에게 잔소리하기에는 이제 아니다 싶다가도 나도 모르게 싫은 소리 쓴소리를 하게 된다. 그러면 남편은 이내 상처받는 듯하다. 내가 왜 싫은 소리 하는지는 인지하지 못하고 내 목소리의 높이와 강약에 느낌으로 판단하는 듯하다.

마치 어린 아기가 엄마의 목소리와 얼굴과 표정에서 읽듯이 그렇게 말이다. 나 자신 종종 자책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다. 노인 우울증 상담을 받을 필요가 있는 남편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해준 것이 없음을 알기에 말이다.

지난겨울 부쩍 안 좋아진 남편 탓에 나는 바깥 구경을 못 하고 봄에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지나쳐 버렸다. 더 늙기 전에 방방곡곡 다녀보고 싶은데 외국에 살 때 한국에 가면 제주도에 다시 가보자 그리고 여행도 많이 하자고 했는데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얼마 전 지인이 집에 와서 나를 검사해 준 스트레스 지수가 전문가의 상담이 필요한 지수란다. 그런데 남편 또한 나보다 더 스트레스 지수가 높게 나왔다. 간간이 나에게 질문한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남편을 위해 어떤 조치가 바람직할까? 상담을 받게 할까 운동을 시킬까? 병원에 가서 더 좋은 시스템으로 검사를 받게 해 볼까? 다른 요양 보호사가 집에 오면 나보다는 낫지 않을까?

이제 한가지씩 실천하기로 다짐해 본다. 남편이 노인임을 받아들이자. 다른 어르신은 노인으로 인정되는데 내 남편은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잘하려는 마음 내려놓고 안 되는 것 애쓰지 말고 내 한계 내에서 돌봐주자. 편하게 도와주자. 그리고 후회하지 말자. 그러다 그러다 한계가 오면 잠시 쉼을 얻자. 누군가에게 부탁해도 그때는 부끄러운 일, 미안한 일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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