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죽이려던 강경파 멀리한 南人의 영수
서인들 견제 무릅쓰고 일본과의 화친 강조
이순신 후원자로 남해바다 지켜낸 영의정

신숙주(申叔舟)가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성종이 친히 찾아와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래, 경은 나에게 남길 말이 있소?" 신숙주는 "일본과 화친을 잃지 마소서"(叔舟臨卒 成宗問所欲言 叔舟對曰 願國家毋與日本失和)라는 말을 남겼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 서문에서 이 같은 일화를 소개하며 일본과 관계를 끊은 것이 1592년(선조 25년) 임진·정유재란의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을 개탄했다.
좋든 싫든 이웃 국가인 일본을 잘 살펴보고 그에 대한 유비무환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징비록>을 썼다. 오는 22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취임을 앞둔 류진(柳津) 풍산그룹 회장은 류성룡의 13대 직계 후손으로 남인의 계보를 잇는 기업인이다.
류성룡 선생은 이순신 장군을 천거해 임진왜란 극복을 주도한 명재상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론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조선 중기 붕당정치의 한가운데서 갈등 조정자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중종 37년(1542년) 관찰사를 지낸 중영의 아들로 태어난 류성룡은 21살부터 도산서원의 퇴계 이황을 찾아 수학한 뒤 25살 때인 명종 21년(1566년) 문과에 급제해 일찍 벼슬길에 들어섰다. 같은 동인에선 이산해가 1539년생이고 서인에선 송익필(1534년생), 이이와 정철(1536년생), 성혼과 심의겸(1535년생)으로 아래위 10년을 동년배로 간주하던 당시의 풍속에서는 동갑내기나 마찬가지였다.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한 1590년 전후 조선에서는 이들 집권 사림파가 동서 양파로 나뉘어 당파 싸움을 벌였다. 처음에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렸다가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후에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당시 영의정 정철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현실 정치를 좌우한 서인의 비선 실세였던 송익필은 1586년 동인의 수장인 이발로부터 장례원(掌隷院) 소송을 당하면서 졸지에 추노 신세가 된다. 3년의 와신상담 끝에 정여립 역모 사건(1589년)을 일으키며 동인 정권을 끌어내리는 것엔 성공했지만 곧 임진왜란이 터지고 피란 생활을 하다가 1599년 충남 당진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다.

조상으로부터 받은 '갈등 조정' 유전자
美 정계 네오콘-리버럴 아우르는 능력
류성룡은 이처럼 혼란스러운 붕당 정치 속에서도 갈등 조정자 역할을 하며 49세인 1590년 우의정까지 올라선 인물이다. 당시 영의정이자 서인을 대표하던 송강 정철이 '광해군 세자론'을 먼저 거론하게 만든 이산해(이후 북인으로 분파)의 계략에 휘말려 선조의 노여움을 사 몰락하는 일을 계기로 정철을 죽이려는 강경파와는 등을 지고 남인(南人)의 영수가 된다.
다름 아닌 류진 회장에게도 선대로부터 갈등 조정 유전자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계의 '마당발'로 불릴 만큼 민주·공화당을 넘나드는 인맥을 자랑해 온 그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전 대통령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선친인 류찬우 선대 회장이 방위산업을 통해 미국 군부 및 공화당 인사들과 인연을 맺은 것이 계기가 됐다.
먼저 2002년 12월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이 사망하는 사건 당시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과 전화를 한 것도 류 회장의 '간곡한 요청' 때문으로 전해진다. 또 2015년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인천 골프 회동을 주선한 바도 있다.
이뿐 아니라 공화당 소속이면서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과도 친분이 깊어, 네오콘과 리버럴(진보주의자)을 아우르는 친미 인사로 분류된다. 과거 군부정권의 실세들과도 가깝다. 류 회장의 형인 류청 씨는 지난 1982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차녀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당시 이름 박서영) 전 육영재단 이사장과 결혼했다가 6개월 만에 이혼했다.

안보를 위한 경제가 중요해진 시대
류 회장 관심 이미 캠프데이비드行
임진왜란 발발 1년 반이 지난 1593년 10월 1일 선조는 한양으로 돌아왔다. 명 중심 일변도의 정책이 일본의 군사적 도전을 불러온 당시 상황은 특정 국가와의 친선에 방점을 둔 '경제를 위한 안보'(security for economy)보다 '안보를 위한 경제'(economy for security)가 더욱 중요해진 오늘날의 경제 전쟁 상황과도 유사하다.
류성룡은 영의정으로 군사를 총지휘하며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 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할 것을 주장했다. 이순신의 후원자 역할을 맡아 남해 바다도 지켜냈다.
하지만 뜻밖에도 전쟁이 끝나가던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정철 사건 때부터 앙심이 쌓였던 북인들은 류성룡이 이 사건의 진상을 적극적으로 변명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그의 관직을 삭탈시켰다. 이후 1600년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평생을 은거했다.
류성룡은 <운암잡록>(雲巖雜錄)에서 "자기와 같은 무리이면 비록 그른 것이라도 옳다고 하고, 자기와 다른 무리이면 옳은 것이라도 그르다 한다"는 동이불화(同而不和)로 치닫는 붕당정치 현실을 비판한 바 있다. "온 나라 안이 그르고 옳음을 떠나 헐뜯기를 일삼는 것이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면서 '화이부동'의 지혜를 가지라고 요구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전경련은 징전비후(懲前毖後)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에 따라 일본과의 갈등 중재자의 역할에 이미 나섰다. 강제징용 배상 협상 과정에서 일본 측 피고 기업의 판결금 변제 참여 대신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발전을 명분으로 기금 조성을 추진 중이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앞서 한미재계회의 위원장으로 5월 워싱턴 회담을 물밑에서 성공시킨 류진 회장의 관심은 한·미·일 정상이 오는 18일 미국 워싱턴DC 캠프데이비드 별장에서 가질 '세기의 담판'에 맞춰져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