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을 위한 임시정부 법통 계승 뜻 확고
김구 제헌국회 부정하며 반대 입장 표명
이종찬 주장은 김구式 '좌우합작론' 유사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원년으로 하는 대한민국 연호를 처음으로 주장하며 1948년 8월 15일 광복(주권 회복)을 완성한 사람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반면 이종찬 광복회장의 주장은 이와 비슷하면서도 건국이라는 핵심 개념이 빠져 배가 산으로 가는 듯한 느낌이다.
2일 국회 홈페이지상의 과거 의사록을 검색하면,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 축사에서 "(대한)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라며 5·10 총선에 의해 수립된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임을 강조했다.
또 이에 앞서 이 전 대통령은 1948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중앙정부 수립안 결정 축하 국민대회' 연설에서도 국제연합(UN) 결의에 따라 수립될 정부는 "비폭력주의로 궐기한 29년 전의 3월 1일에 성립한 대한임정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반면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의 상징으로 활동한 김구 주석은 1948년 6월 7일 기자회견에서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본다"면서 반대 입장을 취했다. 당시 그는 좌익과 우익이 합작을 통해 한반도의 남북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좌우합작운동을 벌여왔는데 이종찬 회장의 건국 배제 노선도 이와 유사하다.
이 회장은 1948년 건국론은 곧 이승만 건국론으로 이승만을 신격화하는 것이라면서 "임시정부 법통 계승이 사회주의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폭넓게 인정해 주자"는 취지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다시 말해 이승만 정부가 계승한 것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임시정부를 부정했던 미군정이었다는 좌우합작 세력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 전문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선언함으로써 역사 논쟁은 일단락됐다. 그런데 광복회가 이 전 대통령 취지와는 정반대로 1919년 대한민국 원년설을 건국 부정 논리에 차용하면서 시계가 해방 정국으로 되돌아가는 모양새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임시정부의 국가성에 대한 강한 비판을 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인호 교수는 칼럼을 통해 "임시정부는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이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권능을 내외로 인정받는 정식 국가가 아니다"며 "임시정부 시절 함께 참여했던 공산주의 계열의 요인들이 자유민주주의 계열의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직에서 사임시킨 일도 알고 계시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고 이에 대해 이종찬 회장이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세력은 모두 친북 또는 극우"라고 발언해 구설에 올랐다.

그러나 이종찬 회장은 최근 세계일보 인터뷰에서도 좌우합작론을 이어갔다. 그는 "김원봉처럼 대한민국 건국이 아닌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사람들은 서훈을 주지 않는 게 타당하다"면서도 "다만 해방 이전에 사회주의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경우 이는 독립운동의 하나의 방편이었으니 폭넓게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이 그만큼 관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 취임 후 두 번째를 맞는 8·15 광복절 행사에 건국 75주년 개념 포함 여부를 결정해야 할 국가보훈부의 머리가 가장 아파졌다. 앞서 박민식 장관은 주간조선과 인터뷰에서 "건국의 아버지는 이 나라가 무슨 정체성을 기반으로 어떤 역사를 거쳤으며 앞으로 어느 길을 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며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임정 수립 연도인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정해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뜻에 따라 제1공화국 역시 처음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했으나 1948년 9월 25일 국회가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단군기원을 법정 연호로 채택했다. 이후 박정희 정부가 국제 조류에 맞춰 현재 통용되는 서력기원을 추진해 1962년부터 사용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