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vs 이종찬 건국 논쟁 따라잡기
주권 회복 뜻하는 광복은 해방과 달라
올해가 78주년 광복절이란 주장 오류

1949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 모습. 중앙청 건물 윗부분에 내걸린 대형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 ‘한번 뭉처(쳐) 민국 수립, 다시 뭉처 실지 회복’은 독립 1주년을 기념하여 국민에게 공모한 것이었다. /국가기록원
1949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 모습. 중앙청 건물 윗부분에 내걸린 대형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 ‘한번 뭉처(쳐) 민국 수립, 다시 뭉처 실지 회복’은 독립 1주년을 기념하여 국민에게 공모한 것이었다. /국가기록원

광복절(光復節)이란 빼앗겼던 나라의 주권을 다시 회복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국경일을 말한다. 삼일절(三一節), 제헌절(制憲節), 개천절(開天節), 한글날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5대 국경일의 하나다.

31일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보훈청은 1945년을 기점으로 78주년 광복절이라는 용어를 써오고 있다. 즉 쇼와 덴노 천황이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을 선언한 8·15를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로 보는 관점인데, 사전적 의미로는 1945년 8·15는 '해방' 1948년 8·15는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물론 해방과 독립이 건국까지 이어졌다는 의미에서 올해를 78주년 광복절로 불러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런데 이종찬 광복회장이 보름 앞으로 다가온 1948년 8월 15일 건국 사실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원로 간에 격한 논쟁이 시작됐다.

광복절이 원래 1948년 8월 15일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을 기념하는 날인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건국 논쟁의 포문은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열었다. 1948년 건국론자로서 이종찬 회장이 1919년이 대한민국 원년임을 강조한 것이 자칫 건국으로 비칠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이인호 교수는 지난 6월 30일 이종찬 회장에게 '1919년 건국설 거두시라'는 공개서한을 통해 "1948년 8월 15일이 아니라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 출범이 우리 대한민국 수립이었다는 주장은 분명한 역사 왜곡"이라고 직격했다.

앞서 이종찬 회장은 6월 4일 MBN 정운갑의 집중분석 (시사스페셜) 인터뷰에서 "1948년 8월 15일 주권이 회복됐기 때문에 이를 건국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충돌한다"는 사회자의 질문에 "저는 1919년이 대한민국 원년이라 보고 있다"고 답했다.

1948년을 주권 회복 시점으로 본다면 북한과의 정통성 다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1919년까지 끌어올려서 원년으로 정하는 것이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더 우월하다는 취지라고도 했다. 그럼에도 '건국'과 함께 애매모호한 '원년'이라는 말이 혼용되면서 양측 오해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윤석열 대통령(당시 검찰총장)이 지난 2021년 6월 9일 서울 남산예장공원 개장식에서 이종찬 광복회장(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당시 검찰총장)이 지난 2021년 6월 9일 서울 남산예장공원 개장식에서 이종찬 광복회장(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건국 부정 감별사에 걸린 광복회장
헌법상 1919년 원년 주장하면서도
1948년 8·15 건국 두고선 격한 논쟁

역사학계에서 이인호 교수는 이른바 건국 부정론자 감별사로 통한다. 그는 "1919년 건국설은 문재인같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주장하는 맹목적 통일지상주의자들 일부가 국가 정체성을 훼손하고 국민 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내놓은 주장임을 모르냐"면서 이종찬 회장이 1919년 건국을 주장한 것으로 몰아붙였다.

다만 이종찬 회장은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이 회장은 지난 3일 광복회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나는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고 했지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그렇게 광복회가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하면서도 1948년 건국을 인정하면 양측의 갈등이 생길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이 회장의 다음 발언이었다. 그는 기미년 3.1독립선언서에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라고 써 있는 것을 근거로 "이인호 선생이 말한 1948년 건국은 더더욱 무리한 주장"이라고 했다. 자신은 1919년이 대한민국의 원년임을 선언했을 뿐이고 1919년도 1948년도 건국이 될 수 없다는 논리였으나 이인호 교수 입장에선 건국 부정으로 받아들여졌다.

두 원로 간의 논쟁은 동아일보 지면상으로 이어져 <김순덕의 도발> 코너에서 가족까지 참가한 지상 토론이 벌어졌다. 이종찬 회장의 아들이자 윤석열 대통령 죽마고우인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편지글로 가세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이인허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 토론회 석상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 토론회 석상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철우 교수는 학자로서 대한민국의 국가성(statehood)에 대한 여러 견해를 경청한다는 전제를 깔면서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된 신생국이라면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이냐"며 이인호 교수에게 따졌다. 그는 "광복회가 제헌헌법을 선포한 1948년의 의의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려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1948년 8·15 건국은 끝내 부정하는 논리를 폈다.

다시 사전적 의미로 돌아가 광복절이 주권을 회복한 건국일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면 1965년 2월 27일 창립돼 이종찬 회장이 제23대 회장을 맡고 있는 광복회라는 단체명도 성립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건국일'과 '광복절'에 대한 국민과 정부, 학계의 인식 혼란은 '해방'과 '광복'을 둘러싼 용어를 혼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됐다. 

'광복절'은 원래 1948년 8월 15일에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건국'과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제정됐다. 하지만 이에 앞서 반공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1945년 8·15를 '광복'이라 말하기를 좋아했고 좌익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해방'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해방'이란 말은 ‘민족해방’이란 용어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도입한 용어로서, 1948년 8·15 전에는 항일독립운동 세력 중 좌익들이 주로 선호하던 용어였다. 

이 같은 문제를 처음으로 지적한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는 "처음 '광복'을 사용할 때 의미를 찾아보니 '광복 조국' '광복 독립'의 줄임말로 쓰였다”며 "즉 '조국을 영광스럽게 되찾는다'는 의미였는데 이 말이 줄임말이 되어 '광복'으로 불리면서 '해방'의 의미로 뒤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주권 회복이나 독립과 같은 목적어가 빠지고 광복만 사용하다 보니 추상적인 혼선이 왔다는 설명이다. 이런 가운데 1987년에는 헌법 조문이 개정되면서 '3.1독립정신을 계승하고 대한민국을 재건한다'라고 했던 것이 '1919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라고 바뀌었다.

양동안 한국 중앙연구원 교수에 따르면 제헌헌법 제정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임정 계승론자였던 반면 김구 주석은 부정적 의견론자였다. 1987년 헌법에 임시정부의 법통이 담기기 전인 전두환 대통령 시기 1982년부터 교과서에서 1945년 8·15를 기술할 때 ‘광복절’로 기술하도록 지시됐다. 1945년 8월 15일을 '해방일'을 넘어 주권 회복 개념인 '광복일'로 착각하는 것이 보편화된 계기다.

구한말 의병에서 신흥무관학교로까지 이어지는 남인들의 독립운동 산실 경상북도 안동 임청각의 2021년 모습. 현재 복원 작업 중에 있다. /연합뉴스
구한말 의병에서 신흥무관학교로까지 이어지는 남인들의 독립운동 산실 경상북도 안동 임청각의 2021년 모습. 현재 복원 작업 중에 있다. /연합뉴스

日 천황 항복이 광복이라는 이종찬
건국 말해서는 안 된다는 이철우
해방·분단에 초첨 맞춘 소론 후예

다시 정리하면 '광복(光復)'이란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이고  '건국(建國)'이란 '나라를 세움'이라고 정의돼 있다. 즉 건국은 대한민국 국가가 성립된 것을 강조하는 용어로 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표현해도 무리가 없다. 

반면 이철우 교수는 건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국민이 알고 있는 8월 15일 광복절과 관련 일제에 빼앗겼던 주권 회복의 의미를 희석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통을 부정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는 해방과 분단 과정에만 초점을 맞춘 역사 인식이다.

지난주 통일부 장관으로 취임한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는 <국가론의 관점에서 본 대한민국 건국의 특징과 의의>라는 논문에서 "종족적 문화적 측면에서 민족이 분단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남북한에 엄연히 근대적 성격을 갖는 나라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면서 건국 개념 정립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양동안 교수도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이란 논문을 통해 "원래 독립·건국과 동의어였던 '광복'이 (날짜가 같은 이유로) '해방'과 동의어로 왜곡되고 '광복'에서 독립·건국의 의미가 삭탈된 오늘의 상황은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 정립된 광복과 해방의 정확한 의미와는 부합하지 않는 억지요 변괴"라고도 지적했다. 

조선시대 서인의 분파인 소론(少論)으로 분류되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후손인 이종찬 회장도 과거 인터뷰에서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1945년 8월 9일)한 다음 날"을 광복을 맞은 날로 기억하고 있다. 이회영 선생은 셋째 형 이철영이 임청각을 판 땅을 마적 떼에 뺏긴 뒤 구한말 의병 활동을 펼쳐온 경북 안동의 남인(少論)들이 중국 지린성에서 틀을 닦아 놓은 신흥무관학교에 합류했다.

중국 상해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며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이종찬 회장 입장에선 일본 천황이 항복선언을 한 날을 광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또 이인호 교수는 '윤석열 정부에 드리는 제언'을 통해 광복절이 해방 78주년, 건국 75주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놨다.

광복회는 오는 3일 '대한민국 정체성' 선포식을 개최할 계획이다. 모든 공식 문서에 서기(西紀) 대신 '대한민국 연호'로 연도를 표기해 올해를 '대한민국 105년'으로 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국가보훈부가 광복과 해방을 동의어로 보고 제78주년 광복절이란 표현을 쓴다면 명백한 오류다.

이와 관련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 저술에 참여한 한 전문가는 "(이종찬 회장처럼) 많은 이들이 광복을 일본 천황이 항복선언을 한 날로 보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2차대전 공식 참전국이 아니었다"며 "따라서 이날을 기준으로 3·8선 이남에서나마 영토와 주권을 회복한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을 공식 건국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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