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준의 마이 골프 레시피 52회]
평일 어른이 한 명도 없는 영국 골프장
학원으로 몰리는 한국 학생들과 대조
행복하게 사는 법 체득할 수 있는 운동

16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최초의 프로 대회인 디 오픈 챔피언십이 열리는 영국의 링크스 코스들을 ‘오픈 로타(Open Rota)’라고 부른다. ‘로타’는 영어로 ‘순번으로 돌아가며 맡는다’는 뜻이 있다. 그래서 디 오픈은 1860년 제1회 대회가 열렸던 프레스트윅 GC를 포함하여 총 14곳에서 돌아가며 대회를 개최하는 전통이 있다.
하지만 프레스트윅 GC(24회)와 머슬버러 링크스(6회), 로열 싱크포스 GC(2회), 프린스 GC(1회)에서는 더 이상 대회가 열리지 않는다. 과거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장비와 탁월한 기량을 갖춘 선수들의 경기력을 소화하기에는 코스의 제원, 즉 전장이나 난이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160년 세월의 시험을 통과한 오픈 로타는 현재 총 10곳이 남았는데, 그 중 디 오픈을 열두 번이나 개최한 난이도 높은 코스가 로열 리버풀 GC이다.
이 곳에서 열린 2006년 디 오픈에서 타이거 우즈는 나흘 간의 경기 내내 드라이버를 딱 한 번만 사용하여 화제가 됐었다. 당시 가뭄으로 인해 페어웨이가 예년보다 더 단단하고 빨라서 티 샷을 한 공이 무한정 굴러가 페어웨이 벙커에 빠져 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이에 타이거 우즈는 코스를 잘 이해한 전략적인 플레이를 벌여 18언더파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우승했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세계적인 명문 골프장인 로열 리버풀 GC에 갔을 때의 일이다.
골프는 최고의 인성교육 스포츠
평일 오후에 혼자서 골프장을 방문한 필자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웅장한 클럽하우스를 통과해 1번 홀로 향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그날 오후 코스에는 어른이 한 명도 없었다.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골프를 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어린 소년소녀들이었던 것이다.
이들 중 한 명에게 물으니, 일주일 중 하루, 평일 오후는 회원의 자녀들에게만 코스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방과 후에 골프장에 나와 친구들과 함께 매치 플레이를 하는 모습을 보며 어릴 적부터 골프를 통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그들의 문화가 너무도 부러웠다.
흔히 골프를 ‘The greatest game ever played. 존재하는 최고의 게임’이라고 일컫는 서양인들. 물론 이건 골프 매니아 중 한 명이 만든 표현이겠지만, 여기에는 그럴싸한 이유가 분명 존재한다.
첫째, 골프는 상대를 배려하는 스포츠이다. 함께 플레이하는 동반자가 집중해서 멋진 샷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배려를 하는 문화가 수백 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그래서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골프의 에티켓에 무지한 매너 없는 골퍼는 어디를 가나 환영받지 못한다.
둘째, 골프에는 ‘할리우드 액션’이 없다. 타 스포츠를 폄훼할 의도는 없으나, 우리는 종종 심판의 눈을 속여 파울이 아닌 데도 데굴데굴 구르며 아픈척하고 분명 손끝을 스쳤는데도 아닌 척하여 점수를 따내는 경쟁의 순간을 목격한다. 그래서 이를 잡아내기 위해 전에 없던 비디오 판독이 도입되기도 했다. 그런데 골프에는 이런 속임수가 없다. 대회에서 실수로 골프공을 움직였을 때 선수는 스스로 손을 들어 실수를 인정하고 벌 타를 받는다. 만일 이런 엄격한 골프문화에 반해 속임수를 쓰거나 무지에 의한 실수를 인지하지 못하고 룰을 어겼을 경우 골프계에선 두고두고 해당 선수의 자질을 비판하고 의심한다.
셋째, 골프는 타인과의 경쟁에 앞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잘 할 수 있는 운동이다. 그래서 골프는 혼자만의 시간에 집중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연습을 해야만 실력을 유지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 골프는 과격한 신체 접촉이 필요한 팀 스포츠와는 성격이 다른 지극히 개인적인 스포츠이다. 그래서 골프선진국에서 골프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집중력 향상과 자신감의 고취, 심지어는 신체적, 정신적 핸디캡을 극복하는 도구로 적극 장려되고 있다.
어릴 적부터 남이 보거나 말거나 스스로 규칙을 지키고 상대를 배려하며 자신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는 노력을 자연을 벗삼아 즐겁게 할 수 있는 골프를 미·영·호주의 정부와 단체에서 교육의 수단으로 적극 장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골프문화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골프를 상류층의 전유물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과거 사장님 스포츠라 불리던 골프가 어느새 과장님 스포츠에서 MZ세대가 즐기는 스포츠로 진화했다. 골프가 처음 시작된 영국이 그렇고 골프가 전파되어 꽃을 피운 미국과 호주에서 골프는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즐기는 만인의 스포츠다.
그럼에도 국내에선 한 번 라운딩에 이삼십만원씩 하는 취미를 자녀들에게 즐기게 하기란 현실적으로 힘들다. 한정된 국토에 지어진 수요 대비 턱없이 부족한 숫자의 골프장이 공급자 위주의 사업을 하다 보니 터무니없이 비싼 스포츠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정부와 지자체에서 그들이 약속한 골프 대중화 정책의 일환으로 싼 값에 지역주민들이 플레이 할 수 있는 골프장을 다수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결과 사오만원 미만으로 9홀을 돌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다면, 청소년들이 골프에 입문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아직은 ‘아니오’이다. 그 이유는 한국인이 아닌 독일 기자가 잘 설명해 줬다.
최근 읽은 ‘한국인들의 이상한 행복’이라는 보고서를 쓴 독일 출신 프리랜서 기자 안톤 슐츠의 기사는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한국인들의 행복지수는 왜 낮은 것일까?
“한국인들의 미소 속에는 균열과 얼룩이 있다”는 그의 기사 중 유엔산하 자문기구인 SDSN이라는 단체가 발표한 2021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지수 평균은 세계 149개국 중 62위이고, OECD 37개국 중 그리스와 터키보다 위인 35위라고 한다. 한국이 좋아서 20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그가 진단한 한국인의 불행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는 그 원인을 지나친 경쟁과 이를 방관하는 제도적 문제라고 꼬집는다. 특히 정부가 적극 개선할 수 있는 교육제도에 큰 문제가 있다고 한다. 소위 독일에선 잘 배우기 위해 시험을 보는데 한국에선 시험을 잘 보려고 배운다고 한다.
우리가 외면하고 방관하고 조장하는 도심 밤 풍경이 있다. 밤10시가 다되어 교통지옥을 만드는 학원가. 자정이 다 된 거리에는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이 가득하다. 방과 후 밤 늦게까지 학원가를 전전하는 이들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이들의 불행을 뻔히 알면서도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현재의 행복을 담보로 인내하며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라’라고 말하는 어른들은 과연 그런 삶을 살아본 결과 지금 행복한가?

일개 골프칼럼에서 다루기엔 너무도 무겁고 어려운 이슈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영국 골프장에서 만난 그 소년의 해맑은 얼굴이 자꾸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 청소년들도 프로골퍼를 지망하지 않더라도 필드의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법을 몸소 체득하는 골프의 아름다운 가치를 즐길 수 있는 그 날이 미래에 존재할 수 있을까?
다음 칼럼에선 골프를 통해 청소년의 전인교육을 실천하는 미국의 ‘퍼스트 티’ 프로그램과 상이(傷痍)군인의 재활을 돕는 ‘PGA HOPE’ 프로그램을 소개하겠다.
오상준 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대표
한국인 최초로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학에서 골프코스 설계 부문 석사 및 컬럼비아대 건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송도 잭니클라우스골프클럽 조성공사 등에 참여했다.
2015 프레지던츠컵과 더CJ컵 국제대회 운영을 담당했으며, 미국 GOLF매거진 세계100대코스 선정위원, 싱가폴 아시아골프산업연맹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골프에세이 '골프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면'을 출간했고, 유튜브 '마이 골프 레시피'와 강연 등을 통해 다양한 골프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