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장선희, ‘자수’로 도운 독립 운동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9일부터 21일까지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에서 열린다.

장선희 張善禧 (1893~1970)
운동계열 : 국내 항일 | 훈격(서훈년도) : 애족장(1990)
황해도 재령 사람인 장선희 선생은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언니와 함께 자수(刺繡) 소품을 팔아 그 이익금으로 의연금을 냈다고 한다. 1908년부터 3년간 모교인 안신소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틈틈이 수예품을 제작·판매한 돈으로 학비를 모아 1911년 평양 숭의여학교에 진학할 정도였다.
3·1독립운동 당시 서울 정신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귀향, 독립선언의 소식을 알림으로써 재령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오현주 등이 주도·조직한 ‘혈성단애국부인회’에 가입·활동했다.
혈성단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와 통합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확대·개편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핵심 간부로 활동하면서 지방지회를 조직하고 황해도 재령의 만세사건을 준비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회원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부터 1922년 5월까지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고를 치르는 동안 감옥 안에서 자수 공부방을 만들어 여자 죄수 15명을 모아 자수를 가르치며 민족 문화와 독립운동에 대한 신념을 일깨웠다.
출옥 후 친정집에서 요양하다가, 1922년 12월 도쿄여자미술학교 자수과에 입학해 자수와 그림 공부 등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귀국 후 정신여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이화여고보 교사로 근무했다.
여성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전문기술을 가르치고자 노력하여 1927년 8월에는 경성여자기예학원을, 1932년에는 조선여자기예원을 설립했다. 이곳에서는 자수, 조화, 도화, 면사포 제조법을 가르쳤다.
당시 조선 13도에 무궁화꽃이 만발한 모양을 도안한 ‘근역3천리’를 개발했는데, 이것은 함흥, 재령, 진주 등지의 기독교학교의 자수도안으로 널리 사용됐다. 이렇게 자수로 번 돈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거나 계몽운동 자금으로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후 이화여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장선희 선생은 1945년 9월부터 예림원(미술대학 전신)의 자수 전공을 개설해 교수 겸 초대 과장을 역임했다. 1950년까지 제자를 양성했고 한국 자수의 보급과 여성의 기예교육에 공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