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이효정, ‘경성 트로이카’ 활동가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9일부터 21일까지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에서 열린다.

이효정 李孝貞 (1913~2010)
운동계열 : 국내 항일 | 훈격(서훈년도) : 건국포장(2006)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인 이효정 선생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 후 한글학자 이윤재의 민족주의에 공감하였으며, 5촌 아저씨 이병기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에 입문했다. 박진홍, 이순금 등과 ‘백지동맹’을 주동, 시험을 거부하여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으며, 광주학생운동에 동조·시위에 참가해 종로경찰서에 잡혀갔다. 3학년 때는 이평산의 경성RS협의회의 독서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졸업 후 선생은 사회주의단체 ‘경성 트로이카’에 가입하고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경성 트로이카는 이재유 등이 주도해 만든 단체로 반제국주의 투쟁, 학생운동, 노동조합운동을 주로 펼쳤다. 그녀의 종고모였던 이병희 역시 단체에서 활약했다.
1933년 9월 21일, 종연방직(鐘紡) 경성제사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자, 그녀는 노동운동가 이재유의 지도를 받아 여직공을 선동하여 총파업을 지도했다. 노동쟁의의 확대를 꾀해 공장 내 조직의 확대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별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계획 하에 파업을 선동하였던 것이다. 파업 이후 1933년 10월 17일 청량리에서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이듬해 ‘적색노조사건’에 연루,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으나 면소 처분을 받았다. 1935년 11월, 이효정 선생은 서울에서 이재유, 권우성 등이 주도 조직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하여 동지 규합과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70세에 ‘회상(경남, 1989)’, 80세에 ‘여든을 살면서(경남, 1995)’ 등 두 권의 시집을 발간하기도 한 선생은 광복 61년이나 지난 뒤인 2006년에서야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지난 2010년 향년 97세의 나이로 별세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에 안장됐다.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공모전에서 큰 상을 받게 되어 기쁩니다. 학교에서 배웠던 독립운동가보다 공모전에 참가하면서 알게 된 여성독립운동가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더라고요. 제가 그린 그림이 이효정 선생님에 대해, 또 여타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내는데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니, 삼일절 특집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신 것을 보게 됐어요. 90년 넘게 살아오면서 겪었을 회한의 세월이 내려앉은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아, 화면 속 얼굴을 그림으로 담게 됐습니다.” - 제1회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자 김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