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이의순, 대한적십자회 조직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9일부터 21일까지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에서 열린다.

이의순 李義橓 (1895~1945)
운동계열 : 중국 방면 | 훈격(서훈년도) : 애국장(1995)
이의순 선생은 이동휘의 차녀이며, 남편은 상해 지역의 독립운동가 오영선(독립장, 1990)이다.
1911년 한일 병합 이후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 있는 민족학교인 명동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애국 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근방의 마을마다 야학을 설치하여 운영하는 한편, 부흥사경회(復興査經會)도 개최했다. 이를 계기로 1919년 명동여학교를 병설하는 등 간도지역 여성 민족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8년 가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신한촌(新韓村)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이곳의 애국지사 채성하의 맏딸 채계복과 같이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10월 당시 회원은 50명이었다. 한편 그녀는 미래 독립전쟁에서 활동할 간호부의 양성을 위하여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 부친이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자, 선생은 1920년 할아버지와 상해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오영선과 결혼하였다. 그 후 아버지가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게 될 무렵에도 상해에 계속 남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 8월, 인성학교 교장 김두봉의 아내 조봉원 등과 함께 기존 1919년 4월 조직된 여성단체인 ‘상해한인애국부인회’를 개조하여 보다 급진적인 조직인 ‘상해한인여성동맹’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이 상해지역 여성조직의 분열을 가져오는 점이 있어 김구 등의 중재로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상해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때 창립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