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오광심, 항일선전활동 전문가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중 열릴 예정이다.

오광심 吳光心 (1910~1976)
운동계열 : 광복군 | 훈격(서훈년도) : 독립장(1977)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남만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통화현 반납배 배달학교 및 유하현 삼원포 동명중학 부설 여자국민학교에서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선생은 배달학교 근무 당시부터 ‘조선혁명당’에 가입·활동하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교직을 그만두고 조선혁명당 사령부 군수처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혁명군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서 지하 연락 활동을 하는 등 독립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 시기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백파 김학규(독립장, 1962)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32년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상황이 악화되자, 선생은 남편과 함께 난징으로 파견되어 임시정부 측에 지원을 요청하고 관내 지역 독립운동 상황을 본부에 전달하는 중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변절자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지만 무사히 임무를 완수해낸 선생은 이후에도 민족 단일당 조직 운동 및 ‘조선민족혁명당’ 부녀부 차장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39년 광서성 유주에서는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가 조직되었고 여기서 선생은 항일 투쟁의 내용을 담은 합창, 연극 및 벽보 제작 등의 활동을 통해 항일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한국광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설 후 선생은 총사령부에서 사무 실 선전사업을 담당하게 됐다. 총사령부가 전방인 섬서성 시안으로 이동하게 되자, 선생도 시안에서 광복군 대원인 지봉역, 조순옥 등과 함께 1년 반 동안 기관지 ‘광복’ 간행에 전념했다.
1944년 공작 활동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남자뿐 아니라, 여자 청년에 대한 초모 공작도 병행됐다. 간부였던 그녀는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에서 “광복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는 것이니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자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됨으로 우리의 혁명을 위하여,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광복군 대열에 용감히 참가하라”고 강조하여 여성들의 광복군 참여를 촉구하였다.
1945년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이었던 남편 김학규 휘하에서 기밀 실장으로 활동했다. 광복 이후 계속 중국에 머물면서 교포들의 보호와 안전한 귀국을 위해 노력했고, 이후 1947년 선양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는 등 활동하다가 1948년 4월 귀국했다.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자료를 찾다보니, 젊은 시설 촬영된 사진과 노년의 사진을 함께 보게 됐어요. 둘 다 흑백사진이지만, 당당하게 살아있는 눈빛만큼은 변하지 않았더군요. 광복군 활동 당시 군복을 입고 있는 늠름한 사진을 보고, 이것을 기초로 초상화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당시의 색과 분위기를 충실하게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정삼선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