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박현숙, 숭의여자중고교 재건설립자

여성경제신문·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광복 75주년 기념 ‘오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중 열릴 예정이다.

박현숙_장하은作 /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박현숙_장하은作 /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박현숙 朴賢淑 (1896~1980)

운동계열 : 국내 항일   |   훈격(서훈년도) : 애국장(1990)

평남 평양(平壤) 사람인 박현숙 선생은 숭의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3년 김경희, 황애덕 등이 주도·조직한 비밀결사 ‘송죽형제회(松竹兄弟會)’에 가입·활동했다. 송죽형제회는 항일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지사 가족들의 후원활동을 한 단체였다.

졸업 후 선생은 전주 기전(紀全)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교내에 ‘송죽결사대지부’를 조직하고 황애덕에 이어 제3대 회장에 선임되어 조직을 이끌었으며, 기전여학교에서 과외수업으로 한국사를 가르치는 등 구국 교육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3·1독립운동 당시에는 평양시내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신병으로 인해 출옥했다. 1919년 11월 기독교 감리파와 장로파의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가 통합하여 확대·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에 가입하여 평양감리파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2천 백여 원의 군자금을 모금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듬해 12월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5월 28일 가출옥하였다. 그 후에도 선생은 ‘신간회(新幹會)’의 자매단체인 ‘근우회(槿友會)’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는 등 여성의 지위향상과 항일독립운동에 힘썼다.

광복 후 1946년에는 여자국민당 총무부장을, 1952년에는 무임소장관과 MRA대회 한국대표를 맡았다. 1953년 대한부인회 최고위원을 역임하고, 숭의여자중·고등학교를 재건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여성운동과 교육 사업에 종사하였다. 1953년 자유당 소속 민의원, 1963년 공화당 전국구의원이 되었다. 그 뒤에도 공화당 중앙위원회 부의장, 3·1여성동지회 회장, 전국여성단체 최고위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작업 준비를 하면서 많은 자료들을 찾아봤어요. 흑백 사진 속 어쩌면 슬퍼보이는 혹은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보며, 제가 그리는 초상화에는 보다 생기있고, 밝은 표정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장하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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