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미투사건의 심리학적 분석

박원순 전 서울시장 / 연합뉴스
박원순 전 서울시장 / 연합뉴스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계열 작가인 필립 얀시(1949~)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외롭게 자랐다. 그때 필립은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해주는 교회 형 헤럴드를 만났다. 헤럴드는 다소 뻣뻣하고 괴팍스러운 스타일이었지만 필립에게는 고마운 형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헤럴드는 좀 더 까칠해졌다. 교회에서 드럼과 같은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싫어했고, 여성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예배당에 오는 것도 마뜩잖아했다. 흑인들이 무식하고 게으르다는 인종적 편견까지 있었다. 헤럴드는 언젠가 미국은 이런 자유분방함과 도덕적 해이 때문에 몰락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헤럴드의 이러한 성향은 마침내 그가 미국보다 더 복음적이고 신실하다고 생각하는 나라를 향해 떠나게 만들었다. 그가 아내와 함께 이민을 간 곳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 헤럴드가 보기에 남아공은 백인들이 집권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나라였다. 인종 간 결혼, 낙태, 도색 잡지 등이 금해진 나라이기도 했다.

아는 사람 하나없는 남아공에 목회를 시작한 헤럴드는 주기적으로 미국에 있는 필립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편지는 늘상 타락한 인류 문명에 대한 경고로 시작해서 이러한 타락에서 벗어나 도덕성을 회복해야한다는 말로 끝났다. 필립은 괴팍하고 근본주의적인 편지 내용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헤럴드와의 추억 때문에 편지를 빠짐없이 읽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헤럴드의 편지가 끊어졌다. 걱정이된 필립은 남아공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공항으로 필립과 그의 아내를 마중 나온 사람은 헤럴드가 아니라 그의 아내와 아들 윌리엄이었다. “헤럴드는 어디 있니?”“예, 말하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놀랍게도 헤럴드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헤럴드는 집에 포르노 센터를 운영하고, 아나운서 등 유명 여성인사들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편지를 여러차례 보내는 등의 일로 체포됐다고 한다. 그는 ‘음란죄로 체포된 목사’로 이미 남아공의 톱스타(?)가 되어 있었다. “미국의 도덕적 타락상을 비난하며 아프리카로 떠났던 헤럴드가 음란죄로 체포되다니?” 필립은 귀국하는 비행기 속에서도, 미국에 돌아와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출소한 후 헤럴드는 다시 필립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처음에는 잠시 겸손한 말투였지만, 이내 그의 편지는 감옥에 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타락에 대한 비난, 타인에 대한 비난과 정죄(定罪)로 가득했다. 그에게는 세상 모든 일, 모든 사람들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오직 단 한사람만이 그의 단죄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헤럴드 자신이었다.

다년간의 성추행 혐의로 피해 여성에게 고소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린 박원순 전 서울시장. 그의 비보를 접한 순간에 나는 헤럴드가 떠올랐다. 왜 뜬금없이 헤럴드 얘기를 하는지는 좀 있다 다시 하기로 하자.

박원순 전 시장의 미투 사건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미투사건과 더불어 우리 사회를 충격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었다. (이하 존칭 생략) 물론 안희정과 오거돈의 경우를 박원순의 경우와 동일한 반열에 놓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희정은 여성 수행비서를 위계에 의해 간음을 했느냐, 아니면 단순한 남녀간의 불륜이냐를 놓고 치열한 법정 다툼을 벌였지만 결국 전자로 판결을 받아 수감 중이다. 오거돈 역시 대학총장시절부터 상습적인 성추행으로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박원순은 서울시장이 되기 오래 전부터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다. 참여연대와 아름다운 가게의 설립, 국회의원 불법 낙선운동, 아동 결식제로 운동 등 굵직굵직한 시민운동이 그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족적이 가장 뚜렷한 분야는 여성 인권분야이다. 그는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을 변론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다소 생소한 ‘성희롱’개념을 도입하면서 사람들을 일깨웠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변론을 맡은 것도 그였다.

일본군의 전쟁범죄, 특히 전쟁 위안부 조직의 불법성을 파헤치는 여성 국제 전범 법정에서 한국측 검사로 참여한 이도 박원순이었다. 성적인 정체성 문제를 전담하는 ‘젠더특보’라는 초유의 자리를 서울시 안에 신설한 이도 박원순이다.

그러므로 왜 인권 변호사, 특히 여성 인권 변호사로도 유명했던 박원순이 왜 여성비서를 수년간 성희롱을 했다는 혐의로 피소까지 되었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은 나름대로 이번 사건을 이해하고 유사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의 피해 여성에게 심각할 정도로 2차 가해가 행해지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먼저 그의 과거 히스토리 중에서 심리학적으로 이번 사건과 관련있다고 볼 수 있는 몇가지 특이 사항을 한번 살펴 보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박원순의 학력시비이다. 그는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했다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할복자살한 서울대 김상진 학생의 추모 모임에 참석했다가 당시 유신정권에 의해 강제 퇴학조치 당했다. 이후 다른 대학으로 편입하여 졸업을 하게되었다.

제22회 사법시험(1980년)에 무난히 합격하는 등 훗날 그의 이력으로 볼 때, 당시 강제로 퇴학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사회계열의 하나인 법학과에 무난히 진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회계열에 입학해서 3개월만에 퇴학당한 그가 ‘서울대 법대 중퇴’라고 그의 여러 저서에 중복해서 기재한 것은 팩트도 아닐뿐더러, 충분히 시비거리가 될 일이었다.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가를 안다. 그러나 그 콤플렉스가 어떻게 그를 사로잡고 있는가는 모른다.” 군사정권에 의해 벌어진 일 때문에 애꿎게 손해를 봤다는 그의 피해의식과 분노는 그에게 일종의 ‘학력 콤플렉스’를 유발시킨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를 입학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의 지적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인권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박원순으로 보았다. 그러나 박원순은 자신을 다른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아니라, 서울대 법대를 졸업은 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서울대 법대를 중퇴를 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이처럼 아무리 다른 사람이 그리 생각하지 않아도 당사자가 그리 느낀다면 그것도 그 사람의 콤플렉스가 된다. 사람들은 콤플렉스가 자신을 사로잡게 만드는 줄은 모른다는 칼 융의 말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박원순의 학력콤플렉스는 “하버드대학 도서관의 책을 다 읽었다”는 과장으로 이어진다. 2011년 10월 당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선 박원순 후보는 그의 홈페이지에 ‘책 욕심부리다 부인 기절한 사연’이라는 제목으로 “원순씨의 책사랑은 유별날 정도여서,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지하에서부터 7층까지의 도서관 책을 모두 읽었다고 합니다”라는 내용을 올려 논란을 자초했다.

물론 이 사건은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재야 인권변호사 출신의 박후보가 강남의 대형 아파트에 사는 게 문제가 되자 집을 공개하면서 집에 책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큰 집에 산다는 이유를 대면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당시 네티즌들은 가만 있지 않았다. “하버드대 도서관 장서 수는 약 3백만권입니다. 이걸 1년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모두 읽었다고 하니 하루에 책을 8,219권을 읽은꼴입니다. 대단합니다.”라고 비아냥거렸다.

학력콤플렉스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행동은 서울시장 집무실에 가득 쌓인 서류더미로 다시 한번 표출된다. 그는 어린이 키높이 정도로 잔뜩 쌓인 서류더미 속에서 일하는 모습을 언론에 즐겨 공개했다.

그는 “보고받은 자료들에서 혹시 좋은 아이디어 하나라도 놓치는 건 아닐까하는 마음에 파일을 정리하다 보니 책장과 책상 서류철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지만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박원순의 학력콤플렉스가 작동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이 문서 사건은 굳이 초단위로 움직이는 서울 시장의 빠듯한 일정을 들지 않더라도, 방대한 분야의 수많은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하는 수도 서울의 장관급 시장의 직무수행을 고려하면 비효율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업무의 ‘위임’은 조직 경영의 기초 중의 기초이다. 박원순의 이 문서들이 모든 일은 다 내 손을 거쳐야 한다는 만기친람(萬機親覽)의 강박관념에서 나온 것인지, 단순한 이미지 메이킹 전략이었는지는 좀 더 살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그의 이러한 콤플렉스가 뭔가 보여주고 싶은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 소위 구두 뒷굽 사건과 옥탑방 거주 사건인데, 오늘은 논외로 한다.

다시 여성인권 문제로 돌아가 보자. 앞서 말한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에 대해서 박원순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성희롱 사건이라는 것이 최초였기 때문에 이 판결로 인해 성희롱의 문제가 때로는 범죄가 될 수 있고, 배상의 문제도 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남녀고용평등법, 성폭력 특별법의 개정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박원순은 2018년도 재판에서 안희정에게 무죄를 내린 판사를 향해서도 “판사가 비판받을 대목이 있다”며 “이런 사건(성범죄)을 판단할 때는 감수성이 굉장히 중요하고, 피해자를 기준으로 해야한다”고 한 인터뷰에서 주장한 적도 있다. 여성 인권 문제를 포함하여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굳건하고, 가해자를 향한 태도는 서릿발처럼 매섭다.

박원순은 서울시장 재임시절 줄곧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고, 성평등을 강조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이번 미투 사건이 공론화 되기 한달 전에도 박원순은 서울시 간부들과 함께 ‘피해자 중심주의 사건 처리’라는 성인지(性認知)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확인돼 더욱 충격이었다.

앞에서 예로 든 작가 필립 얀시의 교회 형인 헤럴드의 구속 사건과  박원순의 미투 사건은 얼핏 보기에 전혀 별개의 사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는 일란성 쌍생아처럼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사안이라고 볼 수 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다. 하얀 축구공을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운동장 한 가운데 놓아보라. 태양의 강렬한 빛에 의해 한 쪽이 빛날수록 반대편 쪽은 그늘이 더욱 진다. 헤럴드나 박원순처럼 정의를 내세우며 다른 사람을 통렬하게 질타하면 할수록 자신의 진정한 마음에도 그에 비례해서 그림자가 짙어진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바람을 심하게 피워 집안에 분란이 끊이지 않고, 어머니가 그 때문에 절치부심 속앓이를 하며 살아가는 것을 지켜 본 아들의 반응은 어떨까.

“아! 남자의 본성 중에 성적 욕망이 이렇게 큰 자리를 차지하는구나. 하지만 개인이 무분별하게 욕망에 눈이 멀면 가족이나 사회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도 있구나. 나는 최소한 자신의 본성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지!”

이런 아들은 장성해서는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 가정에 매우 충실한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가 될 확률이 높다. 반면 되레 아버지를 능가하는 바람둥이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런 경우를 심리학에서는 ‘공격자와의 동일시’라고 한다. ‘미운 사람을 욕하면서 닮아간다’는 우리 속담이 정확하게 같은 말이다.

“바람을 피우는 우리 아버지가 정말 밉다. 차라리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앞으로 나는 여자는 절대로 만나지 않을거야. 결혼도 안하고 혼자살래!”이랬던 아들이 나중에 제 아버지보다 더 방탕하게 외도를 일삼거나 딴 살림을 차리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 속에 꺼림칙한 일, 부끄러운 일, 내 의식적 생각과 맞지 않는 일, 혹은 사회가 수용하지 않을 것 같아서 억눌러서 무의식의 창고 한켠에 밀쳐 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융심리학에서는 ‘그림자(shadow)’라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자가 자신의 본성 중의 일부인 것을 모르고, 그것을 타인이나 세상의 불특정 다수에게 투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그림자가 나의 본성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은 필수적이지만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끊임없이 타인을 무조건 나쁘고, 미개하고, 사악한 존재로 치부해 버린다.

문제는 이런 일이 계속되면 억눌려 있던 그림자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림자의 반란’이다. 바람둥이 아버지를 욕하다가 아버지를 능가하는 바람둥이가 되는 아들이 그런 경우다. 도덕적 문란과 방탕함을 통렬하게 규탄하다 음란죄로 구속된 헤럴드가 그런 경우다. 여성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보지 못하고 비서를 장기간 성희롱한 박원순의 경우가 그런 경우다.

옛말에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란 말이 있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春風)처럼 너그럽게 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는 가을 서리(秋霜)처럼 엄하게 하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단순히 대인관계에서의 황금률로만 보지 않는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바로 나의 본성의 일부이자, 나의 분신일 수 있다는 자각, 다시 말하면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는 고통스러운 성찰을 거친 사람이라야 비로소 타인을 향한 비판도 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한다.

그 사람이 고위 공직자이거나 사회지도층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늘상 우리는 자신에겐 봄바람같고, 타인에겐 서릿발 같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김진국 문화평론가(심리학자 의학자)

김진국 문화평론가, 심리학자·의학자
대학, 언론, 정부부처, 공기업 등에서 근무한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동서고금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 기반으로 한 융복합적 콘텐츠 개발하고 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및 동 대학원을 비롯한 국내외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심리학자, 의학사, 의학석사, 대체의학박사(수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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