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OECD 중 최고 수준 금산분리 규제
산업계 요구 vs 정책 당국 신중론 충돌
주요국, 국가 주도 전략산업 경쟁 가속
"AI 선점은 속도전, 막대한 투자 필요"

인공지능(AI)과 반도체 패권 경쟁이 국가 간 총력전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한국의 낡은 규제에 막혀 초대형 투자를 제때 집행하지 못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챗GPT 생성 이미지
인공지능(AI)과 반도체 패권 경쟁이 국가 간 총력전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한국의 낡은 규제에 막혀 초대형 투자를 제때 집행하지 못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챗GPT 생성 이미지

인공지능(AI)과 반도체 패권 경쟁이 국가 간 총력전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한국의 낡은 규제에 막혀 초대형 투자를 제때 집행하지 못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기업집단 규제 등 구조적 제약 탓에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특히 대규모 자본을 단기간에 투입해야 하는 전략 산업 특성상 금융·산업 자본을 분리하는 금산분리 규제가 자금 조달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비판이다. 

2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과 산업 자본의 유착을 차단하기 위해 금산분리 규제를 강화해 왔다. 그러나 현행 제도에서는 지주사 체제를 둔 대기업이 직접 펀드 운용사(GP) 역할을 할 수 없고 은행 대출이나 회사채 발행만으로는 속도와 규모 모두 글로벌 경쟁에 맞추기 어렵다. 한 번에 대규모 투자자금을 끌어모아 투입하는 구조를 만들기 어렵다는 뜻이다. 
 
재계에서는 "자본 동원 속도가 곧 경쟁력"이라며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샘 올트먼 오픈AI 대표와 면담한 뒤 금산분리 규제 완화 검토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금산분리 규제가 가장 강한 나라로 꼽히는 반면 일본과 유럽연합(EU) 상당수 국가는 사실상 규제를 두지 않는다. 

정부는 여전히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투자 활성화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규제 변화는 최후 수단"이라며 "분명한 이유, 부작용 방지책,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계의 요구와 정책 당국의 신중론이 충돌하며 한국이 전략산업 경쟁에서 적기 대응할 수 있느냐는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반면 해외 주요국은 국가 주도형 경쟁 구도를 강화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삼성과 TSMC를 추격하기 위해 출범한 라피더스에 총 27조원대 지원을 결정했다. 이는 우리나라 내년도 AI 분야 전체 예산(10조1000억원)에 3배다. 시제품 생산과 2나노 공정 개발에 필요한 장비·시스템 비용을 정부가 직접 지원하고 민간 금융권 대출까지 정부 보증을 제공한다.

대만은 이미 수년 전부터 반도체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규정하고 유연한 정책 지원을 이어왔다. 2021년 가뭄에도 농업용수를 TSMC 공장에 우선 공급했고 반도체학과 신입생 선발 주기를 1년에서 6개월로 단축했다. 지난해에는 '대만판 반도체법'을 통과시키며 연구개발(R&D) 비용 25%, 시설 투자 5% 세액공제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은 행정부가 직접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 중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450조원 규모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통해 2025~2029년 데이터센터, 반도체 생산기지, 클라우드 인프라를 동시다발적으로 확충할 계획이다. 

중국 또한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방정부까지 참여한 수백조원 규모의 AI 지원 정책을 연달아 발표하고 있다. 각국은 방식은 달라도 규제·세금 완화, 공공 재정 동원을 통해 전략 산업을 끌어올리고 있다. 정부가 산업 성장의 속도를 끌어올리는 국가 주도형 경쟁 구도가 빠르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책 대응 속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제도 정비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한다. 기술 패권 경쟁이 '속도전'으로 전환된 가운데 한국이 규제 개선 없이 글로벌 전략산업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분수령에 서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기업 규제가 강한 만큼 세액공제 확대와 가업상속 규제 완화 등 폭넓은 지원책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신민수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의 스타게이트나 일본의 라피더스와 비교하면 한국의 지원 규모는 턱없이 부족하다"라며 "AI는 시장 선점이 중요하기 때문에 선도 기업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lysf@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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