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24)
2500년 신화가 누운 들판에서
코인 샤워 6분, 알몸으로 튀어

캠핑장에서 겪는 난감함은 대체로 샤워장에서 생긴다. 오늘 캠핑장의 샤워 시스템은 정말 최악이었다. 코인 50센트짜리 두 개를 넣으면 6분 샤워가 가능하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모든 준비를 완벽히 마친 상태에서 동전을 투입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속옷도 벗고, 수건도 걸어두고, 샴푸 뚜껑도 열어둔 뒤, 일종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동전을 넣어야지 버튼을 누를 새도 없이 물이 쏟아지고 6분 카운트가 시작된다. 문제는 샤워 칸막이 밖에 동전을 넣는 기계가 있다는 것. 아니, 대체 알몸 쇼를 하라는 건가? 다들 어떻게 한다는 거지?

샤워 부스에는 샤워 꼭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옷을 벗을 공간이 없었다. 아시아 여인 체면에 바깥에서 훌렁훌렁 벗을 수는 없고, 안에서 벗자니 물에 젖지 않은 곳이 없고, 걸 데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우스꽝스럽게 의자를 끌고 들어가 그 위에 모든 옷과 짐을 한데 쌓아두는 기묘한 진지를 만들었다.

완벽하게 준비를 마치고 버튼을 눌렀는데 실수였다. 내가 들어가려던 5번이 아니라 6번 칸의 물줄기가 힘차게 쏟아지는 장면을 그 자리에서 지켜봐야 했다. 이탈리아 남부의 슬로우 라이프는 이럴 때 깊은 조소를 남긴다. ‘물은 흘러가고, 인생도 흘러가지요.’ 

겨우 샤워를 마치고 알몸 뛰기로 5번으로 들어가 옷을 끼어 입었다. 전투를 치르고 샤워실을 빠져나오며 본 하늘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다. 텐트로 돌아오는 내내 달이 내 머리 위에 있었다. 그 순간이 이상하게 좋았다.

텐트에 누워 듣는 파도 소리는 ASMR처럼 숙면을 부르고, 바닷바람은 몸의 잔열을 한 번에 훅 빼앗아 갔다. 낮에는 30도에 육박하는 뜨거움이었는데, 밤엔 영하처럼 느껴진다. 이탈리아 남부는 통이 커서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내어준다.

파에스툼의 헤라 신전 /사진=박재희
파에스툼의 헤라 신전 /사진=박재희
파에스툼의 헤라 신전. 헤라 신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잘 보존된 신전이다. /사진=박재희
파에스툼의 헤라 신전. 헤라 신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잘 보존된 신전이다. /사진=박재희

파에스툼은 의외로 소박했다. 신화의 도시라는 표현에 걸맞은 신비함이나 극적인 풍경을 기대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건 남쪽 농촌의 평야뿐이다. 그 조용한 벌판 한가운데 기원전 600년의 헤라 신전과 기원전 460년의 또 다른 헤라 신전이 담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두 건물은 마치 오래된 언니와 동생처럼 균형을 이루고 서로를 닮은 모습으로 마주 서 있다. "우린 2500년째 이러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헤라 신전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아테나와 넵투누스 신전까지, 파에스툼에는 2500년이 넘은 건축가들의 걸작이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은 모습으로 당당하다.

파에스툼에 꼭 와야 한다고 주장한 건 나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를 굳이 찾아온 이유가 바로 이런 순간 때문이다. 압도적인 헤라 신전 앞에 서자, 그 ‘무조건 가야 한다’고 고집했던 내가 스스로 좀 대견하다.

주랑 사이를 걷다 보니, 오래 묵혀둔 의문 하나가 떠오른다. “왜 헤라는 늘 신경질적인 부인처럼 묘사될까?” 우리는 흔히 헤라를 ‘질투 많고 신경질적인 조강지처 신’이라는 이미지로 소비한다. 그리스 신화 속 헤라는 제우스의 반복되는 외도 때문에 늘 화가 나 있고, 그 화살은 종종 무고한 사람에게 꽂히곤 한다. 그래서 헤라라는 이름은 으레 ‘위엄’보다는 ‘징글징글함’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고대 종교 연구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이미지가 남신 중심 신화 편집의 부산물이라고 말해왔다. 가부장적인 질서를 공고화하려면 헤라와 같은 어머니 신보다는 제우스를 비롯한 남신들에게 능력을 집중시켜야 했을 것이다. 여성성에는 남성성보다 열등한 역할을 의도적으로 배치했을 것이고.

절대 권력의 상징인 제우스를 돋보이게 하려면 그의 아내는 조금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인 편이 플롯 전개에 도움이 된다고 여긴 걸까? 일종의 고대판 캐릭터 밸런스 조정인 것이다. 신전을 돌아보면서 헤라의 질투 이미지 설정이 얼마나 의도적인 것인지 느낌이 온다. 눈앞에 있는 돌기둥들은 오히려 이렇게 증거하는 듯 하다.

“고대 사회에서 헤라 여신은 가장 먼저, 가장 넓게, 가장 오래 존중받은 여신이다.”

다이빙하는 남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을 표현했다고 알려진 무덤 프레스코화 /사진=박재희
다이빙하는 남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을 표현했다고 알려진 무덤 프레스코화 /사진=박재희

실제로 그녀는 생명·결혼·질서·가정·도시의 번영까지 거의 ‘전 분야 만능 여신’이었다. 이 정도 역할도 많고 일도 많으면 신경질을 좀 부려도 이해해 줘야 한다. 안 그런가? 여튼 헤라 I 신전은 기둥이 짧고 두꺼워 투박하지만, 자세히 보면 여러 세대를 버텨온 어머니의 어깨 같다. 헤라 II 신전은 훨씬 정제되고 균형 잡혀 있는데, 헤라가 시대를 거듭할수록 사랑을 더 받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헤라 여신을 지나 걸어서 찾아간 아테나 신전은 ‘지혜와 전쟁’을 담당하는 신답게 똑 부러진 미래형이다. 이어 등장한 넵투누스 신전은 고요하면서도 ‘해양 패권국의 상징물’ 같은 위압감을 풍긴다. 이렇게 세 명의 신들을 위한 건물이 한 화면에 들어오면, 헤라가 압도적이다. 단지 ‘질투 많은 아내’일 리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해진다.

헤라가 좀 억울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우스의 스캔들로 이미지가 훼손된 건 그녀였지만, 정작 고대의 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이 어마어마한 기둥들을 올리고 신전을 지어 모시며 제사를 지내고 오랜 세월을 보냈다. 신화가 왜곡한 헤라와 신전이 증언하는 헤라 사이의 간극이 상당하다.

여행이 주는 기쁨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책이나 이야기 속에서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인물이,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았던 ‘집’을 찾아온 순간 전혀 다른 표정을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 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여기서는 진실 찾기까지 덤이다. 

해질녘, 두 신전 사이로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았다. 많은 오해는 누군가의 의도나 편집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직접 와서 본 헤라 여신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신경질적인 질투많은 아내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공동체를 떠받친 오래된 여신인 것이다.

파에스툼을 떠날 무렵 어젯밤 알몸으로 샤워장을 뛰어다니며 해괴한 짓을 하던 나를 내려다봤던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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