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주의 Good Buy]
6년 전 파리의 바람에 떠밀려 산
유니클로 경량 패딩
6년째 계절의 틈을 메워주는
옷장 속 만능 해결사

6년 전. 파리의 9월 어느 날. 기온이 낮진 않았지만 바람이 제법 불던 날이었다. 걸치고 있던 외투는 날씨의 심술 앞에서 무력했다. 파리 도심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있던 나는 그날의 스산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외투를 사 입기로 결심했다.

두리번거리던 중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UNIQLO(유니클로)였다. 여행의 장면들을 화보처럼 남기길 원했던 ‘감성 여행자’의 자존심은 차가운 바람 앞에 힘을 잃었다. 그 순간 만난 유니클로 빨간색 간판이 어찌나 따뜻하게 느껴지던지. 한달음에 매장으로 달려갔다. 

구매 포인트는 단순했다. 지금 당장 추위를 막아줄 수 있으면서 돌아다니기 좋은 외투. 아주 평범하고, 아주 검은 색의, 아주 유니클로스러운(기능적인 소재와 합리적인 가격의 조화) 옷을 고민한 결과, 바삭바삭한 질감의 경량 숏패딩 한 벌을 샀다. “봉투에 담아 드릴까요?” “아뇨, 입고 갈게요.”

파리 여행에서 샀던 경량 패딩 /권혁주
파리 여행에서 샀던 경량 패딩 /권혁주

생각해 보면 여행지에서 사는 옷이란 대개 ‘기념품’인데 나는 그날 ‘필수품’을 산 것이었다. 전무후무한 그날의 일을 돌이켜보면, 가장 여행답지 않은 소비를 했지만 결국 그날 샀던 경량 패딩은 냉장고 속 든든한 밑반찬처럼 내 옷장의 한 자리를 묵묵히 차지하고 있다. 6년 전 파리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 중, 이 경량 패딩만큼의 존재감이 또 있을까 싶다.

경량 패딩. 이름 그대로 가볍다. 그런데 이 ‘가벼움’이 의외로 굉장히 많은 일을 한다. 무겁지 않으니 고민 없이 슬쩍 걸치게 되고, 슬쩍 걸쳤을 뿐인데 사악- 따스해지니 외출이 무난해지고, 외출이 무난해지니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간절기 날씨에 챙겨 입기 제격이다. 불확실한 계절의 변덕과 알쏭달쏭한 일교차의 틈을 완벽하게 메워주는 만능 해결사다.

6년째 언제 어디서든 잘 입고 있는 경량 패딩 /권혁주
6년째 언제 어디서든 잘 입고 있는 경량 패딩 /권혁주

생각해 보면, 이 검은색 경량 패딩이야말로 가을부터 겨울까지(조금 더 꽃샘추위 때까지도) 실생활에서 가장 많이 입게 된다.

쾌청한 날씨에 한껏 멋 낸 코트를 입고 누릴 가을이 며칠이나 될 것이며, 칼바람과 폭설로 무장한 동장군의 위세에 퍽퍽한 롱패딩을 입을 날은 며칠이나 될 것이며, 그런 날씨조차도 난방비가 걱정되어 서늘함이 감도는 실내에서는 무엇을 걸칠 것인지 등을 떠올려보면 경량 패딩만큼 해답이 되는 외투가 없다.

축구로 따지자면 공격수부터 미드필더, 수비수까지, 어떤 포지션에 갖다 놔도 제 역할을 해내는 만능 플레이어인 셈이다. 부상 선수가 있는 포지션을 어떻게든 메우는 '든든한 백업 선수' 같은. 

‘이 옷 잘 샀다’는 생각이 들 때는, 살 때가 아니라 사고 나서 시간이 지났을 때다. 옷을 살 때마다 막연하게 미래를 상상한다. “올겨울은 얘로 다 해결하겠지.” “딱 지금 트렌디한 옷이니까 한철 주야장천 입으면 후회하지 않겠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입을 수 있을 테니 충분히 값어치 하겠지.”

하지만 결국 진짜 평가는 시간이 한다. 그 옷이 몇 년을 버텼는지, 몇 번이나 손이 갔는지, 입을 때마다 ‘잘 샀다’는 생각이 드는지. 이 세 가지가 전부다.

파리에서 데려온 이 유니클로 경량 패딩은 그 시험을 아주 흠잡을 데 없이 통과했다. 누군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경량 패딩, 어디서든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다못해 한국 유니클로 매장에서도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품은 한국 매장에는 없는 상품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마 그때가 아니었다면 유니클로에서 경량 패딩을 살 일은 없었을 것 같다. 당장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여행지에서 검은색 경량 패딩을 만나게 해 준 그날 파리의 날씨는 어떤, '운명'의 단초였던 걸까?

올해도, 내년에도 이 경량 패딩을 꺼내 입으며 또 생각할 것이다. '정말 잘 샀다'고. 그러면서 기억도 미화될 것이다. 그날의 나는 ‘추워서’ 충동구매를 했던 게 아니라 내재한 현명함(?)을 발휘했던 거라고. 

여성경제신문 권혁주 쇼호스트 kwonhj10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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