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 글에 속아 낯선 남성 가택 침입
익명성 보장 사이트 구조적 허점
보안 업계 “제도적 대응 시급”

"덜컥 문이 열리더니 웬 남자가 거실에서 잠들어 있던 아버지를 만졌어요. 화들짝 놀라 불을 켜니 바지를 움켜쥔 채 현관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낡은 연립주택이라 CCTV도 없어 경찰이 잡지 못한다고 하네요."
사건은 지난달 29일 새벽 1시 20분경 서울 마포구 대흥동 백범로에 위치한 한 연립주택에서 발생했다. 층마다 세대가 하나뿐인 낡은 주택에 낯선 남자 B씨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집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피해자는 4인 가족이 거주하는 22평 남짓한 가정집의 가장 A씨(54). 그는 2일 여성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평소 문 단속을 소홀히 했던 게 이렇게 큰 화를 부를 줄은 몰랐다"고 털어놨다.
인근에서 자영업을 하는 A씨는 사건 당일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은 뒤 밤 11시께 잠자리에 들었다. 약 2시간이 지난 무렵 누군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는 "현관문 바로 앞이 계단인데 처음엔 윗집 사람이 올라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발소리가 멈췄다가 다시 들리길 반복하니 이상하다고 느꼈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불안은 현실이 됐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B씨가 그대로 A씨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순간 ‘강도가 들었구나’라고 생각해 몸이 굳었다고 한다. 한데 침입자는 난데없이 그의 성기에 손을 댔다.
A씨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강도가 들었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성기를 만졌다. 방에서 자던 아들이 불을 켜자 눈이 마주친 그 남자는 그대로 달아났다"고 했다.
"동성애자 만남 사이트에 당신이 글을 올렸잖아요"
사건의 발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입한 남성 B씨는 익명의 동성애자 만남 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보고 A씨의 집을 찾았다.
당일 해당 사이트에는 ‘키 000㎝, 몸무게 00㎏, 나이 00살, 바텀 지금 오실 분’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B씨는 쪽지를 보내 대화를 이어갔고 A씨를 가장한 글쓴이는 "문은 열려 있으니 들어오면 된다"며 주소까지 남겼다.

B씨는 의심 없이 현장을 찾았고 "거실에서 누워 있을 테니 바로 시작하자"는 말에 따라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그곳엔 자고 있던 A씨가 있었다. A씨는 만남 글을 올린 적도 없었고, 동성애자도 아니었다.
누군가 신원을 속이고 그의 집 주소를 사이트에 게시한 것이었다.
A씨는 "사건 이후에도 총 세 차례 낯선 남성이 문을 열려 했다"며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계속 바뀌는 아이디로 우리 집 주소가 꾸준히 올라오고 있었다"고 전했다.

익명성 악용한 신종 범죄
해당 사이트는 회원가입 시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지만 글을 올리면 실명이 ‘블라인드’ 처리돼 익명성이 보장된다. 지역별로 하루 수백~수천 건의 만남 요청 글이 올라온다. 대부분 카카오톡 오픈채팅이나 라인 아이디를 통해 만남을 이어간다. 오픈채팅 역시 일회성 프로필을 사용하기 때문에 추적이 쉽지 않다.
A씨 사례처럼 특정인의 집 주소가 게시되면 피해자는 무방비 상태로 침입을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B씨 역시 "글쓴이가 20대 후반이라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50대 남성이었다"며 "해당 글쓴이를 경찰에 신고했다"고 주장했다.
A씨에 따르면 현재까지 그의 집주소를 무단 도용한 범인은 특정되지 못 했다. 글을 올린 글쓴이의 아이디는 탈퇴 처리됐다.
2016년 봉천동 여중생 살해 사건, 에이즈 감염자의 성매매 모집, ‘N번방 사건’ 등도 모두 익명성과 폐쇄성을 보장하는 앱과 사이트에서 비롯됐다. 익명 앱은 접근성과 은폐성을 무기로 범죄의 온상으로 악용돼 왔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정태호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사이버범죄 발생 및 검거율은 감소 추세다. 사이버범죄 발생 건수는 2020년 23만4098건에서 2024년 20만7815건으로 비슷한 추세를 보였다. 다만 검거율은 2020년 67.5%에서 2024년 53.0%로 급감했다.
일각에선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고 나온다. 앞서 수차례 도입된 바 있다. 지난 2003년 당시 정보통신부는 인터넷 게시판에서 실명제의 단계적 도입을 추진했으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혀 폐지됐다.
이후에도 수 차례 부분적 실명제가 도입되는 등 움직임이 있었으나 2012년 헌법재판소가 "인터넷 실명제는 헌법에서 보장한 표현의 자유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까지 침해한다"고 판단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인터넷 실명제 관련 청원글 가운데 '인간다운 삶을 위해 최진리법을 만들어주세요'는 지난 2019년 10월 16일 오후 2시 40분 기준 8674명이 동참했다. 최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발표한 인터넷 댓글 실명제 도입에 대한 국민 인식 조사결과 응답자의 69.5%가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성범죄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18~2021년 사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중 여성 10~20대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남성 피해자도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익명 기반 플랫폼 환경이 특히 미성년자와 취약계층에 큰 위험을 안긴다고 경고한다.
보안 업계 관계자는 여성경제신문에 "인터넷 익명성과 앱의 접근성은 사생활 보호라는 순기능도 있지만 동시에 범죄에 악용될 위험이 크다"며 "무인증 익명 플랫폼이 범죄의 온상이 된 사례가 많고, 기술 발전과 함께 피해 강도도 커지고 있어 사회적·제도적 대응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여성경제신문 김현우 기자 hyunoo9372@seoul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