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억원 분담 놓고 업권 셈법 갈려
참여 폭·매입가율 세부 조율이 핵심

금융당국이 7년 이상 5천만원 이하 장기연체채권 소각을 위한 ‘배드뱅크’ 설립 재원의 절반을 전 금융권에서 조달하기로 하면서 업권별 이해관계 조정이 본격화되고 있다.총 8000억원 규모의 소요 재원 중 4000억원은 2차 추가경정예산으로 이미 확보됐고 나머지 절반을 은행을 비롯해 금융투자, 보험, 여신전문금융회사, 저축은행, 상호금융, 등 전 금융권이 부담하는 방식이다.
14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이번 방식은 당초 은행권 단독 부담 가능성이 거론됐던 초기 관측과 달라진 결과다. 장기연체채권 중 상당 비중이 2금융권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 자산과 이익 규모가 큰 은행권이 여전히 상당액을 부담하겠지만 2금융권도 사회적 책임 이행 차원에서 참여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금융위원회는 오는 9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산하에 채무조정기구를 설립하고 연내 채권 매입을 시작한다는 계획이다.
배드뱅크 모델은 한국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캠코가 부실채권정리기금을 통해 금융권 부실채권을 매입·정리한 사례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유사한 방식이 활용됐다. 다만 과거가 시스템 리스크 차단 목적이었다면 이번에는 가계·영세 자영업자의 장기부채 부담을 줄이는 사회안정 효과에 초점이 맞춰졌다.
업권별 셈법은 복잡하다. 은행권은 형평성 차원에서 2금융권 동참을 요구해왔고 이미 부실채권 상당 부분을 상각·매각했거나 대손충당금을 적립해둔 상황이다. 반면 저축은행·상호금융·여신전문금융사 등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추가 출연금 부담을 호소한다. 올해 상반기 일부 저축은행의 부실여신비율은 상승세를 보이고 있어 분담 비율이 현실적으로 조정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부업계도 고심에 빠졌다. 현재 거론되는 안은 7년 이상 연체 채권을 액면가의 5% 가격에 일괄 매입해 소각하는 방식인데 대부업계는 해당 채권의 매입가가 최소 25% 이상이라는 점을 들어 손실이 과도하다고 주장한다. 채권 성격에 따라 가치가 다른데 동일 비율로 매각하라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이다. 참여 유인을 위해 1금융권 대출 지원, 코로나 채권 매입 허용 등 인센티브 부여 필요성 등이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4000억원 규모의 재원 분담이 금융권 전체 이익 규모에 비춰 과도한 부담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4대 금융지주의 올해 상반기 순이익이 10조원을 웃도는 상황에서 업권별로 나눠 부담하면 절대적 규모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장기연체채권 소각이 금융취약계층 재기를 돕는 공익적 성격을 띠는 만큼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 참여 폭을 넓혀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다만 2금융권과 대부업권은 경영여건 악화 속에서 추가 출연이 재무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어 분담 규모와 방식에 대한 조율이 불가피하다. 특히 이번 배드뱅크 재원 분담은 첨단전략산업 육성 정책펀드, 금융·보험사 교육세율 인상, 취약차주 지원 확대 등 최근 금융권에 요구되는 다른 재원 조달 과제와 병행되고 있어, 업권별로 분담 구조와 시기를 함께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금융위는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113만4000명의 장기 연체채권 16조4000억원을 소각하거나 채무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매입 대상에서는 금융투자(주식·코인 등) 관련 채무, 유흥업 등 사행성 업종 채권이 제외되며 외국인은 정당성과 필요성이 인정되는 범위에서만 제한적으로 지원된다.
향후 발표 예정인 세부 방안에서 매입가율과 업권별 분담 비율이 어떻게 정해질지가 중요하다. 매입가율은 채권 처리 속도와 범위, 분담 비율은 재원 확보의 안정성과 직결된다. 두 기준이 균형을 잃으면 참여 폭이 제한되거나 재원 소진 시점이 앞당겨질 수 있어 제도 설계 단계에서 세밀한 조율이 요구된다.
또 2금융권과 대부업계 등에 대한 유인 방안도 핵심 쟁점이다. 일부 업권은 채권 보유 비중이 높아 제도 성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만 참여를 망설일 수 있는 여건도 존재한다. 분담 방식, 절차 간소화, 제도 참여에 따른 실익 등을 종합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업권마다 상황이 다르다. 일부 업권은 PF 부실 여파나 자본여력 악화로 인해 당장 출연금 마련 자체가 부담일 수 있다"며 "결국 이런 차이를 좀 반영해서 비율이랑 절차를 현실적으로 짜주고 참여할 만한 유인 병행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장기연체채권 채무조정 프로그램 점검을 위한 전문가 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은행연합회와 생·손보협회 등은 신속히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권대영 사무처장은 "공신력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철저한 상환능력 심사를 거쳐 파산에 준하는 수준으로 상환능력이 없는 ‘정말 어려운 분들’의 채무만 소각된다"고 설명했다.
채권 매입·소각 과정이 금융시스템 전반에 미칠 영향 역시 중요한 지점이다. 단기적으로는 회계상 손실 반영과 자금 유출이 발생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부실채권 정리를 통한 건전성 개선이 기대된다. 이 과정에서 대출여력, 조달 비용, 금융소비자의 거래 조건 등에 나타날 수 있는 변화도 점검 대상이다.
여성경제신문 박소연 기자 syeon0213@seoul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