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디지털 창작자들 한자리 모여
AI시대 콘텐츠 산업 변화와 전망 토론
창작자의 진짜 역할에 관한 질문과 답

최근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DCN(Digital Content Network) 포럼에 다녀왔다. 미국 국무부 교육문화국이 후원한 이 행사는 전 세계 디지털 창작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AI 시대 콘텐츠 산업의 변화와 전망을 나누는 자리였다.
이틀간 진행된 행사는 AI와 XR을 활용한 실습 워크숍과 창작 산업의 미래를 다룬 강연으로 구성됐다. 여러 전문가가 등장했지만 그중에서도 코펜하겐 미래연구소의 부게 홀름 한센(Bugge Holm Hansen)이 남긴 메시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는 단순히 기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짚어냈다.

리퀴드 콘텐츠의 시대가 온다
한센은 우리가 지금 '리퀴드 콘텐츠(Liquid Content)'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기존의 완성형 콘텐츠에서 벗어나 맥락과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재구성되는 콘텐츠를 의미한다.
그는 이를 "From articles to particles"로 설명했다. 기존에는 완결된 콘텐츠(article)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앞으로는 그 콘텐츠를 미세한 단위의 블록(particles)으로 나눈 뒤 사용자의 기기와 위치 관심사 시간대에 맞춰 유동적으로 조합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정적인 콘텐츠에서 동적인 콘텐츠로, 제한적 참여에서 인터랙티브한 참여로, 일반적인 이야기에서 맥락적 경험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넷플릭스가 같은 영화라도 사용자 취향에 따라 다른 섬네일을 보여주거나 틱톡이 같은 음악으로 완전히 다른 피드를 구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콘텐츠는 더 이상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흐르고 반응하는 생명체처럼 작동한다.
이러한 시대에는 콘텐츠 하나하나보다 콘텐츠가 유의미하게 흘러갈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을 설계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창작자의 진짜 역할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콘텐츠가 리퀴드화 된 이후 창작자는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게 될까? 한센은 창작자의 미래 역할을 세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 콘텐츠 환경을 설계하는 사람.이제는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 작가보다 콘텐츠가 어떻게 흐르고 연결될지 전체 시스템을 조율하는 설계자가 중요해진다. 콘텐츠 그 자체보다 콘텐츠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세계를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둘째, 의도와 가치의 큐레이터. AI는 무한한 조합을 만들 수 있지만 무엇이 진짜 의미 있는지, 어떤 가치가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역할이다. 콘텐츠의 깊이와 방향을 잡는 감각 있는 큐레이터가 더욱 주목받을 것이다.
셋째, 변화에 반응하는 민감한 실험자. AI 도구는 날마다 바뀌고, 콘텐츠 흐름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완성보다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시도하는 민감한 실험자만이 살아남는다.
한센은 단언한다. "기술은 앞으로도 계속 바뀔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설계하며 사람들과 연결해 주는 인간의 능력은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
다리의 교훈: 유연함이 생존의 조건
한센이 마지막에 들려준 은유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1990년대 온두라스는 일본 기술자들과 함께 100년을 버틸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건설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후 강의 물줄기 자체가 바뀐 것이다. 강이 흘러야 할 자리에 다리는 남았지만 그 아래엔 이제 물이 흐르지 않았다.
아무리 견고한 구조라도 환경이 바뀌면 무용지물이 된다. 콘텐츠 산업도 마찬가지다. 기술과 전략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대와 플랫폼, 알고리즘이 바뀌면 적응하지 못한 것들은 도태된다.
이 시대에 필요한 능력은 단단함이 아니라 유연함이다. 흐름이 바뀔 때 새로운 다리를 세울 수 있는 감각. 그것이 창작자에게 요구되는 생존 조건이다.

현실에서 체감한 변화
이번 포럼에서 필자는 패널 연사로 참여해 7년간의 콘텐츠 창작 경험을 바탕으로 업계의 변화와 창작자들이 직면한 현실을 이야기했다.
초창기 틱톡은 크리에이터도 적고 영상도 많지 않아 콘텐츠 하나만 잘 만들어도 쉽게 주목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AI 기술은 콘텐츠 제작의 진입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췄고 이제는 누구나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만큼 경쟁은 치열해졌다. 하루에도 수십만 개의 콘텐츠가 쏟아지는 가운데,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선 거의 매일 영상을 올려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많은 창작자들이 점점 지치고 번아웃을 겪고 있다.
반면 작가로서는 훨씬 편해졌다. 필자가 <콘텐츠가 전부다>를 집필하던 2022년엔 자료 하나 찾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은 AI가 수십 개의 자료를 정리해 주고 비교 분석까지 도와준다. 덕분에 필자는 자료수집보다 스토리텔링과 창의성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AI 시대, 진정성이 답이다
이런 변화를 겪으며 필자가 한 가지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앞으로 콘텐츠의 차별점은 '완성도'가 아니라 '진정성'이 될 거라는 점이다.
AI는 빠르고 정교하다. 원하는 스타일과 톤의 콘텐츠를 단 몇 초 만에 만들어낸다. 이제 기술적으로 '잘 만든 콘텐츠'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창작자가 직접 겪은 실패와 성장의 이야기, 밤새 고민하며 찾아낸 깨달음은 다르다. 진짜 경험에서 우러나온 메시지는 여전히 사람만이 만들 수 있다. 그 진심은 점점 더 희소해질 것이고 희소한 것은 곧 가치가 된다.
AI는 도구일 뿐이다. 진짜 창작은 '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AI 시대의 창작자는 단순히 기술을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만의 '이유'를 가진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도 더 오래 버틸 수 있지 않을까.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여성경제신문 허영주 크리에이터 ourcye@seoulmedia.co.kr
허영주 크리에이터
성균관대학교에서 연기예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걸그룹 ‘더씨야’, ‘리얼걸프로젝트’와 배우 활동을 거쳐 현재는 팬덤 640만명을 보유한 글로벌 틱톡커 듀자매로 활동하고 있다. <2022콘텐츠가 전부다> 책을 썼다.
다재다능한 ‘슈퍼 멀티 포텐셜라이트’로서 여러 채널에서 크리에이터 이코노미를 설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다. ‘한평생 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어 열정적으로 살아보기’를 실천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