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마디의 유니폼]
유니폼을 입는 것은 책임감을 입는 일
유니폼 속에 감춰진 한 사람

오사카 이틀째. 오전엔 친구와 둘이 근처 사찰인 북어당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한껏 높인 대문 계단을 내려와 호텔에서 올 다른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일러스트레이션=ⓒ윤마디
사진, 일러스트레이션=ⓒ윤마디

11월 중순의 따뜻한 오사카. 거리가 한가한 오후 시간. W 호텔이 있는 지역인 미나미센바 중심 거리에는 오성급 호텔, 보석 브랜드, 수입 자동차 사옥 등이 이어진다. 전날 밤 여기에 택시 타고 올 때 가로수마다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이 황홀했는데, 낮에는 햇살이 훨씬 눈부셔서 불 꺼진 알전구가 입을 다물었다. 깨끗하고 넓은 대로에 얌전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걸어간다. 무소음 시계 같은 오사카 거리.

일러스트레이션=ⓒ윤마디
일러스트레이션=ⓒ윤마디

길 건너편에서 걷고 있던 회사원이 눈에 들어왔다. 큰 유리창 건물을 지나가고 있었다. 양복 입고 서류 가방을 손에 든, 체격은 내 키만 한 160~170cm, 60kg대 정도, 40~50대 남성. 혼자 걷는데도 걸음걸이가 꼿꼿하고 단정했다.

횡단보도 불이 켜지자 그 사람이 이쪽으로 건너왔다. 잰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와 방지턱을 가볍게 뛰어오르는 리듬에 양복 뒷자락이 팔랑~했다. 그 남자가 들어 올린 가뿐한 리듬이 이쪽 건물 그늘에 바람을 불러온 것 같았다. 얼른 사진을 찍었다.

일러스트레이션=ⓒ윤마디
일러스트레이션=ⓒ윤마디

며칠 뒤 일본을 떠나기 전날, 찍어놨던 사람들을 모아서 그렸다. 남는 자투리 종이를 묶어 만들어서 짧둥한 나의 드로잉북. 나는 전체 크기를 잡고 들어가는 버릇이 안 들어 있어서 그리다 보면 맨날 종이가 모자란다. 이때도 그래서 남는 다리를 옆에 그렸더니. 이 사람 몸에서 곡선이라고는 양복 뒤트임 자락, 구두코뿐이다.

무슨 일을 할까? 회사원이겠는데. 하긴 '회사원'처럼 두루뭉술한 말이 어딨나. 양복을 입었으니, 누군가를 만나는 일을 하겠지? 오후 세 시니까 퇴근은 아니고 거래처나 협력사에 미팅 가는 길이겠지?

40~50대로 보이니까 차장님이나 부장님쯤 됐겠지? 서류 가방도 비싸 보여. 영업팀이라면 야근도 술자리도 많을 텐데 저렇게 말끔한 걸 보니까 회사의 이미지가 중요한 일일 것 같다. 고급 물건을 팔거나 높은 직급의 사람을 자주 만나는 일을 할 것 같아.

이 조용한 자본의 거리에서 자기만의 걸음으로 가는 남자. 약속 시간에 20분쯤 여유롭게 가는 듯한 발걸음. 소심하게 풀럭이는 옷자락에서 긴장 속 여유가 느껴졌다. 감정이, 인간성이 느껴졌다. 열린 옷자락으로 슬쩍 보이는 하얀색 와이셔츠처럼.

지난 5월 29일 자 한국경제에는 UAE 대통령 첫 국빈 방문으로 무함마드 대통령과 간담회를 갖기 위해 재계 리더가 총출동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이 소공동 롯데호텔로 들어서는 사진들과 함께였다. 기사에 실렸던 사진은 연합뉴스 사진으로 교체함 /연합뉴스 
지난 5월 29일 자 한국경제에는 UAE 대통령 첫 국빈 방문으로 무함마드 대통령과 간담회를 갖기 위해 재계 리더가 총출동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이 소공동 롯데호텔로 들어서는 사진들과 함께였다. 기사에 실렸던 사진은 연합뉴스 사진으로 교체함 /연합뉴스 

지난 5월 29일자 한국경제에는 UAE 대통령 첫 국빈방문으로 무함마드 대통령과 간담회를 갖기 위해 재계 리더가 총출동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이 소공동 롯데호텔로 들어서는 사진들과 함께였다.

재계 대표들이 취재진 앞 고급 세단에서 내릴 때 재킷을 추스르며 나오신다. 아, 뒷자리에 혼자 앉아 있을 땐 편하게 계셨겠구나, 재킷 단추를 풀거나 벗어두고서. 흰 와이셔츠가 맨살인 듯 얼른 검정으로 덮는 이분들에게서 드라마 <미생> 포스터가 생각났다.

꼭짓점에 계신 분들인데 단체로 같은 옷을 입는다고 미생의 삶이 떠오르다니. 드라마 속, 아니 현실 속 바둑판 같은 사무실에서 치열하게 살던 인턴,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전무님··· 각자가 짊어진 압박감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래 이분들도 회사의 일원이니까 회사원인 거지. 이분들도 지금 더 높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지. 부탁하러 가는 길이지. 우리 물건을 사주십사, 하고.

드라마 '미생' 포스터 /tvN
드라마 '미생' 포스터 /tvN

저분 아래 부하직원이 몇 명일까? 생각하니 미생의 오상식 과장님 같다고 할까. 부하직원 셋의 팀장님 오상식 과장. 미생에 등장한 웬만한 인물의 서사를 다 겪어보았을 위치인 오상식 과장.

드라마 내내 피곤함에 절은 눈에 흐트러진 머리로 뛰어다니던 오상식 과장의 일은 다름 아닌 무언가를 지키는 일이었다. 프로젝트도, 매출도, 부하직원도 잃지 않고 지켜내는 것이 팀장의 일이었다. 타 부서와 소리 지르고 싸울 때마다 감정적으로 대할 문제가 아니라는 타박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떠나는 전무의 전용차 밖에서 허리 숙여 부탁하던 간절함이 기억난다. 공격하고 방어하는 것이 팀장의 일이지만 간절함은 오상식의 것이다.

내리느라 고개를 숙일 때 흘러내리는 옷자락에서, 평생 어디서 주눅 들 일 없을 분들이 긴장을 가리려는 듯 서둘러 단추를 채우는 모습에서, 손에 주름이, 살집이 눈에 띈다. 인간적이네, 인간적이야. 사람들이 기억하는 모습은 젊은 날 두 눈에 총기 가득한 대외용 증명사진인데, 주름과 살집은 이들도 나이를 먹는다는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렇네, 이분도 한 사람인 거지. (그래서 신세계 정용진 회장님의 인스타그램이 인기였나보다.)

양복도 일종의 유니폼 같다. 유니폼을 입는다는 건 회사를 소개하고, 회사의 입장을 설명하고, 우리 회사 물건을 사주십사 부탁하는 일. 곧 그 일의 책임감을 입는 일이다. 그래서 지켜야 하는 것을 못 지킬 때 책임지고 물러나는 것을 ‘옷을 벗는다’라고 한다. 책임의 크기는 달라도 우리는 모두 책임감이라는 유니폼을 입고 비슷한 모습으로 출퇴근을 하지만, 그 속에는 각자의 성질과 마음씨를 지니고 살아간다. 그리고 사회라는 전쟁터에서 책임감은 갑옷이고 그 성질과 마음씨가 나의 예리한 무기, 정교한 장비가 된다.

‘나만의 바둑을 둔다’라던 <미생>의 인물들이 생각나서 그런가. 우리는 재벌 총수를 신문 1면 혹은 사회면에서나 볼 수 있고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재벌을 보통 ‘재벌 3세 다이아 수저’나 ‘권력 승계 싸움' 정도로 소비하지만, 이분들이 일하러 가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나는 이분들이 노련하게 일하는 모습이 궁금해졌다. 오상식 과장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양복 속에 숨겨진 회사원 한 사람의 고민과 노력, 잠 못 드는 밤까지도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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