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준의 낭만밖에 난 몰라]
스승의 날, 선생님을 추모하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주신
고3 시절 담임 류인일 선생님

뜬구름 같은 허무의 에너지를 이상을 구현하는 잠재력으로 이끌어주는 일은 이 세상 선생님 말고 어떤 직업이 해낼 수 있을까요? 피 한 방울도, 유전자 하나도 섞이지 않고 이웃도 아닌, 우연한 교실의 인연으로 만난 허무주의 제자의 꿈을 찾아 주고 조련해 주신 선생님을 왜 우리 국가와 사회는 단지 지식노동자로 여길까요? /픽사베이
뜬구름 같은 허무의 에너지를 이상을 구현하는 잠재력으로 이끌어주는 일은 이 세상 선생님 말고 어떤 직업이 해낼 수 있을까요? 피 한 방울도, 유전자 하나도 섞이지 않고 이웃도 아닌, 우연한 교실의 인연으로 만난 허무주의 제자의 꿈을 찾아 주고 조련해 주신 선생님을 왜 우리 국가와 사회는 단지 지식노동자로 여길까요? /픽사베이

청년도 아니고 소년도 아닌 열아홉 고3에게는 미래에 무엇이 되고픈 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등하굣길 가방 들고 길을 걸으면 늘 만나는 무념무상의 뜬구름으로 살다 가고 싶었습니다. 몇 달 지나면 만 스무 살 성인이 될 싱싱한 심장을 가진 나에게 현실과 미래는 아무런 재미도 의미도 없었습니다.

물리 시간에 배운 중력 가속도의 법칙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대책 없이 새까만 우주 블랙홀 속으로 쑤욱 빨려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요. 수업 시간 내가 앉은 자리에서 슬며시 투명 인간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국영수 예상 문제들을 달달 외워도 시간이 부족하여 애가 타는 고3이라지만, 리처드 바크 (Richard Bach)의 에세이 소설 <갈매기의 꿈>을 완독했습니다. 또 여러 번 수업 시간에 몰래 읽다가 그만 입시 준비에서 완전히 벗어나 딴 길로 새어 버렸습니다. 

김삿갓처럼 뜬구름을 벗 삼아 물 한 모금에 시 한 수 읊으며 정처 없이 세상을 몇 년만 떠돌다가 객사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늦깎이 사춘기 마음의 방황을 시작할 무렵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습니다. 

완독하고 나니 다음 생에는 하얀 갈매기로 태어나거나, 깊고 푸른 우주를 떠도는 새털구름이 되었다가 대지를 적시는 빗물이 되고 시냇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가는 상상을 했습니다. 시나브로 수증기로 변하여 헤르만 헤세 아저씨와 싯다르타가 바라보던 뜬구름이 되고 싶었습니다. 

"머지않아 나는 나뭇잎이 되고, 흙이 되고, 뿌리가 될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종이 위에 글을 쓰지 못하게 되고,

화려한 개망초의 향기도 맡지 못할 것이다.

치과 영수증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지도 않을 것이며,

험상궂은 관리로부터 신분증을 제시해 달라는 성가신 요구도 듣지 않게 되겠지.

나는 파란 하늘에 구름이 되어 둥둥 떠다니고,

시냇물의 물살이 되어 흘러가고,

나무에 새순으로 돋아날 것이다.

스스로를 잊은 채,

 

수천 번 염원해 왔던 변신을 하게 되리라."

 

(시: 헤르만 헤세)

 

가수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 노래도 없던 시절이었고, 존 키팅 선생님의 <죽은 시인이 사회> 영화도 만들어지기 전의 시절이었습니다. 나를 숨 쉬게 한 것은 <갈매기의 꿈> 소설 속 조너선 리빙스턴의 비상이었습니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시그니처(Signature) 문장은 인생길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길들기보다 길들지 않은 나의 길을 걷도록 이끈 인생 문장이 되었습니다. 아뿔싸, 갈매기 리빙스턴의 고독한 영혼이 그 중요한 시기 고3의 까까머리 입시 준비생에게 턱 하니 스며들고 말았습니다.

입시를 며칠 앞둔 날 담임 선생님은 급우들 한 명 한 명 각자 미래에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입시를 앞두고 남은 며칠 동안 아이들이 최선을 다하라고 나름 동기 부여할 요량이었나 봅니다. 아이들은 즉흥적으로 각자 대통령, 장관, 의사, 판사, 선생님, 장군, 예술가, 기술자, 사무원, 은행원 등등··· 술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되고 싶은 직업이 정말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 꿈과 직업은 별개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그저 사회적으로 이름 없고 타이틀 없는 '평범한 아무나'로 살다가 바닷가 뜬구름 속을 헤집고 나는 갈매기 리빙스턴이 되고 싶었습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의 북극성을 찾게 되어, 실패작이 아닌 내 인생에 감격했습니다. 뜬구름을 좋아한다면 그것이 왜 좋은지 문장으로 써 보라는 선생님의 격려는 내 속에 숨은 나의 재능과 꿈을 끌어낸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사진=최익준
내 생애 처음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의 북극성을 찾게 되어, 실패작이 아닌 내 인생에 감격했습니다. 뜬구름을 좋아한다면 그것이 왜 좋은지 문장으로 써 보라는 선생님의 격려는 내 속에 숨은 나의 재능과 꿈을 끌어낸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사진=최익준

그런데도 마냥 주어진 대로 숨 쉬고 산다는 것을 상상하기가 더욱 싫었습니다. 제가 대답할 차례가 되어 저는 "하늘과 구름 속을 높이 멀리 날아다니는 갈매기 리빙스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할지 꿈이 저에겐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들은 깔깔대고 박장대소하며 웃기는 대답이라 떠들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제 말을 듣고 숙제로 독후감을 한 편 써 오라고 하셨지요. 선생님의 지도 덕분에 그해 가을 교내 독서발표회와 교지에 '갈매기와 나'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선정되었습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교내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독후감에서 '내가 갈매기가 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하여도, 내 가족과 친구들을 돌봐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 우선'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진정한 꿈이 있는 갈매기는 현실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갈매기라고 정의했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의 북극성을 찾게 되어, 실패작이 아닌 내 인생에 감격했습니다. 뜬구름을 좋아한다면 그것이 왜 좋은지 문장으로 써 보라는 선생님의 격려는 내 속에 숨은 나의 재능과 꿈을 끌어낸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오호통재라~ 그런 나의 선생님이 노환으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영원히 떠나셨습니다. 저에게는 프란체스코 교황님의 서거보다 더 슬프고 아픈 날이었습니다. 자정 무렵 부고 소식을 듣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첫 기차를 타고 새벽 영안실의 첫 문상객이 되어 찾아갔습니다. 영정 앞에 엎드려 절하니 소리 없이 뜨거운 눈물만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세파를 버티거나, 타고 넘거나, 견디며 살아 보니 그 시절의 내가 그토록 흠모한 작가 리처드 바크(Richard Bach)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가 제시한 이상의 세계는 선생님이 주신 사랑을 구현하기 위한 훌륭한 재료였을 뿐입니다. 

뜬구름 같은 허무의 에너지를 이상을 구현하는 잠재력으로 이끌어 주는 일은 이 세상 선생님 말고 어떤 직업이 해 낼 수 있을까요? 피 한 방울도, 유전자 하나도 섞이지 않고 이웃도 아닌, 우연한 교실의 인연으로 만난 허무주의 제자의 꿈을 찾아 주고 조련해 주신 선생님을 왜 우리 국가와 사회는 단지 지식노동자로 여길까요?

자본주의 지식 경쟁 때문에 교육의 영혼이 함몰되었다 하여도, 꿈의 가치를 심는 진짜 선생님들이 여전히 많은데 우리는 왜 숲에서 물고기를 찾을까요? 스승의 영혼을 받아먹고 성장한 제자로서 질문을 던집니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떠나보낸 슬픔은 소리 나지 않는 울음소리임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주신 영원한 나의 선생님 성함은 류-인-일 선생님이십니다.

여성경제신문 최익준 박사·산업정책연구원 교수/(주)라온비젼 경영회장
thebom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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