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마디의 유니폼]
일이란 뭘까?
자리에 나를 맞추는 일
나를 감추면서 드러내 주는 일
1. 일이란 뭘까?
자리에 나를 맞추는 일
지난 11월, 일본 여행 출국 날 새벽.
집을 나서면서 드로잉북을 챙기려는데 늘 쟁여두던 새것이 없었다. 언젠가 자투리 종이를 모아 호치키스로 찍어놓았던 종이 뭉치를 부랴부랴 찾아 꺼냈다. 중구난방 튀어나온 모서리를 잘라내고, 대충 반으로 뚝 자른 정사각형 두 권을 가방에 넣었다. 일본에서 사서 써야지, 하고서.
그런데 웬걸, 코딱지만 한 물건이 끝도 없이 진열된 나라에서 무지 드로잉북만큼은 도무지 구할 수가 없었고 헐레벌떡 들고 나온 임시 드로잉북을 모서리가 헤질 때까지 알뜰살뜰 채워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정사각의 종이에는 유난히 제복 입은 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조용한 뒷모습을 보고서야 '이 드로잉북이 일본에 딱 어울리는 모양이었구나' 알았다. 한 공간에서 역할로서 살아가는, 깨끗한 스퀘어에 몸을 맞춰 넣어 FM으로 살아가는 보폭이 작은 사람들. 전철역, 주방, 골목길, 담벼락, 어디서든 유니폼을 입으면 지금의 자리가 곧 일터가 되고 그의 행동은 일이 됐다. 그것이 비록 가만히 기다리는 일일지라도.
'일이란 뭘까' 하는 생각에 기다리는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 문득 책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일이란 뭘까?
나를 감추면서 드러내 주는 일
멀뚱히 서 있는 일을 할 때가 있었다.
누군가 자리만 지키면 되는 일.
참나. 이게 무슨 일이야.
하루 종일 내 자리에 앉아있는 일도 오래 했다. 하루 9시간 내 직분을 다하기 위해 아침에 밥 먹고 밤에 씻고 잠드는 것도 다 일이 되어버리고 일 외의 삶은 자투리가 되어 희미해졌다.
일이란 게 뭐지? 나를 지우는 건가?
일본에서 그려온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펼쳐 보았다.
시곗바늘 사이를 묵묵히 견디며 자신을 유니폼 안에 감춘 사람들. 그러나 행인이 바람처럼 밀려다니는 조용한 도시에서 유니폼은 그 한 사람을 공중에 들어 올려 도시에 외치고 있었다.
이 사람이 여기서 일을 하고 있다!
당신들이 정처 없이 흐르는 여기서,
이 사람은 지금.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림을 그리기로 하고 5년째, 나는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눈곱 떼고 앉아 노트북으로 일을 시작한다. 새벽 4시부터 10시까지 일하고, 점심부터 밤까지는 진짜 내 일,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쓴다. 내 작업시간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정해진 시간만 하는 일을 찾다 보니 일이 자꾸 새벽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시간과 돈을 쪼개 쓸 때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돈 버는 일을 일이라고 해야 하나, 내 작업을 일이라고 해야 하나. 돈 못 버는 이 일은 일인가, 취미인가. 일은 일인데 수입은 없으니 직업이라고는 못 하려나. 이 일이든 저 일이든 아무튼 종일 앉아서 일만 하다가 진짜 내 삶은 언제 누리나.
더 이상 내 자리를 향해 집을 나서지도, 그 자리에 맞는 옷을 갖춰 입지도 않는 지금. 그러나 여전히 내게 수입을 가져다주는 일을 그저 생계형 아르바이트일 뿐이라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고 돈이 많으면 쉬운 그림만 그리고 싶다는 나에게, 제복의 나라는 날 붙잡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이봐! 진짜 가짜가 어딨어? 이게 네가 아니면 누군데?”
돈은 수단일지 몰라도 일은 수단이 될 수 없다. 일에 바치는 내 전 생애가 수단이 되면 나도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된다. 그러니 존재 이유를 밖에서 가져와 붙이지 않아도 된다. 돈 버는 일에도, 시간을 쓰는 일에도, 너 자신에게도.
일이라는 말로 가려둔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알아봐 주고 싶어졌다. 그것이 나를 드러내 주길 바라면서. 그래서 책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어질 글의 순서
서문 : 일하는 사람
<도쿄>
도쿄역, 기관사 : 신호를 만들다
신주쿠역, 경찰 : 화살표를 읽다
오모테산도역, 초등학생 : 짊어지다
시부야역, 버스 기사 : 보다
황궁, 시각장애인 가이드 러너 : 돌파하다
이후 교토와 오사카 편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