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채 이상 임대사업자 곳곳 폭탄
무자본 갭투자자도 역전세 피해자
전세 사기 발 금융위기 가능성 증폭

민간 임대사업 정책이 서민 주거 안정이라는 목표를 이루긴커녕 전세 사기 대란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특히 정부가 인센티브를 대폭 늘린 2017년부터 임대사업자들이 빨아들인 빌라·오피스텔 세입자들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무자본 갭투자가 횡행했던 서울·수도권 아파트도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전국에서 6100여 채를 굴린 빌라왕 일당은 임대사업자가 공급을 늘리도록 해 전세금을 안정화하려던 정부의 제도를 적극 악용했다. 이와 함께 2700여 세대 전세를 놓고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세입자 연쇄 자살을 부른 건축왕 남헌기의 놀이터도 정부와 인천광역시가 깔아준 셈이었다.
전세 사기는 2030 청년과 신입사원 신혼부부 등에 가장 큰 피해를 안겨주고 있다. 한국에서 집값에 맞먹는 전세 보증금을 떼인다는 건 인생의 결실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여성경제신문이 국가 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전세의 난'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① 빌라·건축왕 vs 무자본 갭투자?···정부가 전세사기 공범
②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남' 회장···그를 도운 건 인천市
③ 정부·여당 무죄?···송영길이 단초 제공, 유정복 일 키워

 

전세 사기 불바다가 전국을 덮쳤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세입자 자살 사건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전세  사기 사태가 부산시와 세종시로까지 확산했다. /여성경제신문 이준희 만평
전세 사기 불바다가 전국을 덮쳤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세입자 자살 사건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전세  사기 사태가 부산시와 세종시로까지 확산했다. /여성경제신문 이준희 만평

지금까지 드러난 빌라왕·건축왕 사건은 전국 100채 이상의 다주택 임대인 모두가 주의할 대상임을 보여준다. 또 이런 가운데 갭투자(전세 끼고 주택매입)가 성행한 서울·수도권 아파트 세입자도 보증금을 못 받는 사태가 하반기부터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윤석열 정부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매입임대 하는 방식으로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을 약속했다. 전세 사기 피해 임차인에게 경매로 넘어간 주택의 우선매수권을 부여하고 만약 매입을 원하지 않을 시 LH 등 공공이 대신 우선매수권을 행사해 주택을 사들인 뒤 피해자에게 임대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보증금 회수'에 사활이 걸려 '전세판 뱅크런' 움직임을 보이는 세입자 보호에 한계가 있어 보인다.

지난 26일 전세 사기·깡통전세 피해자들이 모인 대책위는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가 원하는 방안은 보증금 채권의 공공 매입"이라며 "정부가 고통을 분담하고 범죄수익 환수 등으로 비용을 회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에선 특별법 제정을 두고 전세 보증채권 매입을 주장하는 더불어민주당과 LH를 통한 매입임대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국민의힘이 정면충돌해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100채 이상 보유 임대사업자가 대형 폭탄이라면 무자본 갭투자자는 경기 침체기 부동산 시장에서 나타난 역전세(집값이 세입자에게 내놔야 할 전세보증금보다 낮아지는 현상)를 견디지 못하는 케이스다. 결국 이들 임대인이 보증금 지급을 미루거나 고의성 부도를 내면 서민층은 극단적 상황으로 몰린다.

지난 4월 18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경인국철(서울지하철 1호선) 주안역 광장에서 '전세 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가 전세 사기 피해자 합동 추모식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 18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경인국철(서울지하철 1호선) 주안역 광장에서 '전세 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가 전세 사기 피해자 합동 추모식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보증금 채권 매입 빠진 정부 지원책
피해자들 "실망"···차라리 극단 선택
인천은 미추홀, 서울은 강서가 위험

정의당 심상정 국회의원실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주택자금 조달계획서를 보면 2020~2022년 8월 전세가율(전세보증금/주택의 매매가격)이 80%를 넘는 갭 투기 거래 건수가 가장 많은 곳은 서울 강서구(5910건)로 나타났다. 지난해 7월 제주에서 사망한 빌라왕 조직의 일원인 정모 씨도 강서구 일대 신축 빌라와 오피스텔 약 100채를 보유한 임대사업자였다. 이어 충북 청주 5390건, 경기 부천 4644건, 경기 고양 3959건, 경기 평택 3857건 등이 갭투자가 많은 지역으로 확인됐다.

제주도 빌라왕 사망 사건을 조사한 경찰은 빌라왕 6개의 조직이 전국에서 전세를 놓은 빌라는 6100여 채에 달한다고 밝혔다. 인천 미추홀구를 중심으로 전세보증금을 떼 먹어 3명의 연쇄 자살을 부른 건축왕 남헌기는 2700여 세대를 직접 지어 굴렸다.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12월부터 올 3월까지 전세 사기 의심 거래 469건을 경찰청에 수사 의뢰했다. 지역별로 의심 사례는 서울 291건, 인천 91건, 경기 80건으로 집계됐다. 서울에서는 강서구가 166건으로 가장 많았고 양천구(27건), 구로구(25건), 관악구(15건), 금천구(15건) 등 순이었다.

다만 이번에 수사 의뢰가 이뤄진 469건은 최근 서울과 인천에 개소한 전세피해지원센터에 접수된 사례다. 아울러 국토부 부동산소비자보호기획단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건에 한정된 것이어서 전세피해지원센터가 없는 다른 지역까지 조사가 이뤄진다면 피해 사례는 훨씬 더 많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전세보증금반환보증보험 보증사고 건수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부동산중개업소에 붙은 전·월세 안내문. /연합뉴스
전세보증금반환보증보험 보증사고 건수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부동산중개업소에 붙은 전·월세 안내문. /연합뉴스

임대사업자에 대한 과도한 인센티브
직장인대출 LTV 묶인 중 문어발 확장

임대사업자 갭투자가 기승을 부린 이유는 직장인 가계 대출자들이 담보인정비율(LTV) 40%에 묶여 대출받지 못할 동안 LTV 80% 적용을 받아 수월하게 대출을 늘리며 갭투자를 할 수 있었던 과거 제도 탓이다. 빌라왕 일당은 이 같은 갭투자를 이용해 2017년 7월부터 2020년 9월까지 서울 강서구·양천구와 인천 등지에서 600여 채가 넘는 대부분의 주택을 매수했다.

정부의 유도대로 임대주택은 크게 늘었다.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2016년 등록된 임대주택은 227만 호였는데, 2020년 304만 호까지 늘었다. 각종 세제 혜택을 노린 다주택자들이 전국 곳곳에 투기를 해온 결과였다. 이에 2018년 김현미 전 국토부 장관이 양도소득세 중과, 종부세 과세 조치와 함께 LTV를 40%로 줄였으나 신규 주택 취득에 한정된 것이어서 실효성은 없었다. 이에 2020년 이후에도 갭투자는 기승을 부렸다.

공무원이 많이 거주하는 세종시는 전세가율이 낮아 '깡통전세' 가능성이 낮은 지역으로 분류돼 왔다. 하지만 이랬던 세종시도 일 년 새 전세가율이 인천 다음으로 높아졌다. 전세가율이 보통 80%를 넘으면 전세 보증금을 되돌려받기 어려운 이른바 '깡통전세'로 분류된다. 최근 1년간 거래 실적을 보면 세종지역 연립이나 다세대 주택 평균 전세가율은 86.6%에 달한다.

지금까진 세입자가 목돈이 있는 경우 1억 원가량의 전세를 내는 편이 유리해 전세계약을 선호하고 높은 시세로 전세계약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으나 전세가 하락으로 임대사업자가 추가로 2000만원을 내놔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세종시에 거주하는 한 공무원은 "100여 채 이상을 보유한 임대사업자 한아무개 씨가 부동산에 등록된 전세 매물을 일방적으로 내리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뱅크런 양상도 엿보인다. 서울 강북 지역에서 빌라 임대 사업을 하는 박모 씨는 "가격을 낮춰도 전세 사기 때문에 세입자를 구할 수 없다"면서 "또 최근 세입자들이 줄줄이 계약 해지를 통보하면서 어떻게 보증금을 마련할지 감당이 안 된다. 정상적으로 사업을 영위해 왔는데 전세 사기범으로 몰릴까 겁도 난다"고 말했다.

빌라의 전세가와 매매가가 계속 내리면 역전세, 깡통 전세로 인한 보증금 미반환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질 수밖에 없다. 마치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에서 예금자들이 돈을 빼가 뱅크런하듯이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것으로 우려하는 세입자들이 '전세런'을 진행 중인 통계도 보인다. 실제 국토부에 따르면 지난 1~2월 임대차 계약 중 전세 비율 역시 60%에서 52%로 감소했다. 서울의 빌라(다세대, 연립주택) 전세 계약은 9777건으로, 전년 동기(1만4575건) 보다 33% 정도 줄었다.

전세사기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세입자들이 뱅크런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스웨덴 왕립 노벨위원회가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202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참고 자료로 첨부한 1930년대 대공황 상태 당시 뱅크런을 묘사한 그림. /노벨위원회
전세사기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세입자들이 뱅크런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스웨덴 왕립 노벨위원회가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202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참고 자료로 첨부한 1930년대 대공황 상태 당시 뱅크런을 묘사한 그림. /노벨위원회

전세판 뱅크런 ing···전세 비율 급감
제2금융권까지 미칠 경우 금융위기

뱅크런이 닥치면 만기가 30일밖에 남지 않은 어음이나 집을 저당 잡은 주택저당채권도 아무런 차이 없는 위험 자산일 뿐이다. 뱅크런에 따른 금융 붕괴 위기를 예고한 논문으로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은행이 대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예금자가 돈을 인출하려고 한다는 소문은 자기실현적인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안전자산으로 알려진 미 국채에 대부분을 투자한 SVB에서 미실현손실 사태가 발생한 것도 같은 이치다. 인천지역 전세 사기 주범 남씨가 공공개발 사업계획서에 자금 조달 방안으로 '임대보증금과 임대료 수입'을 기재했다. 

또 금융감독원이 전세 사기 대책의 일환으로 경매 유예를 본격 추진하고 나섰지만 난맥상은 여전하다. 금융회사가 경매를 통해 선순위 담보권을 행사하면, 후순위 채권자인 세입자는 전세보증금의 상당 부분을 돌려받지 못하고 집을 비워야 하는 점을 감안한 것이지만 구조적으로 선순위 채권자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전세 사기에 당한 후순위 채권자(세입자) 피해를 구제해야 하는 난제가 있다.

자칫 금융리스크로 전이 가능성도 있다. 전세 대출을 취급한 곳이 대부분 새마을금고 등 제2금융권이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 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상호금융별 평균 유동성 비율은 신협 85%, 농협 50%, 수협 66%, 산림조합 72% 수준이다. 지난해 상반기 대비 5~10% 낮아진 수치다. 유동성 자산보다 유동성 부채가 더 많아졌다는 뜻이다. 지난해 말 기준 평균 유동성 비율이 저축은행 177.1%, 새마을금고 112.8%, 카드 385.4%, 캐피털 202.3%인 데 비하면 한참 낮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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