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준의 마이골프레시피 74회]
월드 클래스 골프장 방문 기록 ②
호주 태즈마니아주의 케이프 위컴
50억에 만든 자연과 하나된 18홀

호주 태즈마니아주의 한 섬에 들어선 케이프 위컴 1번홀 /오상준
호주 태즈마니아주의 한 섬에 들어선 케이프 위컴 1번홀 /오상준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자연은 더 자연스러워진다. 물론 이런 당연한 얘기가 골프장에도 적용된다. 자연 깊숙이 자리잡은 골프장의 모습이 주변 환경과 하나돼 어디까지 골프장이고 어디서부터 원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지 구별이 힘들수록, 그 골프장은 땅을 잘 골랐고 자연 친화적으로 잘 만든 골프장이라고 말한다.

‘쉽게 갈수도 없는 곳에 골프장을 만들어 놓고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느냐?’는 질문에 줄 수 있는 답은 없다. 그런 외진 곳에 연간 8만명 이상 내장객을 유치해 평균 영업이익 40%를 상회하는 골프장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도 골프장을 만들 수 있고, 멀리 전 세계에서 찾아온 열혈 골퍼들에게 평생 남을 추억과 감동을 줄 수 있는 골프장을 만드는 건 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명품 골프장을 만드는 비용이 산비탈을 부숴서 만든 평범한 수준의 골프장을 만드는 비용의 10분의 1도 안 된다면 믿을 수 있을까?

필자는 3주 전에 그런 곳에 다녀왔다.  조종사까지 4명이 탑승한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호주 태즈마니아주의 한 섬에 들어선 케이프 위컴 2번홀 그린 /오상준
호주 태즈마니아주의 한 섬에 들어선 케이프 위컴 2번홀 그린 /오상준

호주 남단의 섬에 숨어있는 지상낙원

지금부터 12년 전, 호주에 있는 코스설계자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통화 끝에 친구가 남긴 말이 있었다.

‘준, 태즈마니아에 가 봤지? 그 섬 북쪽에 킹 아일랜드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그곳 해안 절벽 위에 18홀 골프장을 만들 수 있는 땅이 최근 매물로 나왔어. 그런데 여기 지형과 경관이 기가 막히다고 해서 나도 가보려고 해. 대충 사오백만 달러면 코스와 자그마한 클럽하우스를 짓는데 충분할 꺼야. 혹시 한국에 이런 골프장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는 회사가 있으면 찾아봐 줘.’

한국 돈으로 50억이면 18홀 골프장과 클럽하우스를 지을 수 있다니.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외딴 곳에 투자하겠다는 한국 기업은 없었고, 그로부터 4년 후 ‘케이프 위컴’이라는 이름의 골프장이 바로 그곳에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채 2년이 되지 않아 이 골프장은 세계 100대 코스가 됐다.

태즈마니아는 호주 남단에 위치한 10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주(州)이다. 제주도의 37배 정도 되는 태즈마니아 섬이 이 주에서 가장 큰 섬이고, 그 위로 호주 본토와의 사이에 킹 아일랜드가 위치해 있다. 사실 작은 섬이라고 했지만, 이 섬의 크기는 제주도의 6배나 된다. 낙농업과 수산업, 특히 치즈와 랍스터를 수출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총 1585명이 살고 있는 섬에 가기 위해서는 익숙지 않은 운송수단을 이용해야 했다.

멜버른 샌드벨트(Sandbelt) 지역에 위치한 킹스턴 히스(세계 22위)에서 오전 라운드를 마치고, 같은 동네에 위치한 무라빈(Moorabbin) 공항에 도착하니 짐을 가득 실은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종사는 유리창을 열고 들어왔고, 좁디 좁은 기내에 탄 3명의 승객 뒤로는 섬으로 실어나를 생필품이 가득했다. 하늘로 솟구친 비행기가 짙은 구름과 기류를 뚫고 40분을 날아 킹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양양 고속버스 터미널보다도 작은 공항에서 렌터카를 빌려 섬의 북쪽 끝단 케이프 위컴 골프장으로 향했다. 창 밖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목초지 위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갈색 얼룩무늬 젖소와 검정색 소들이 지나가는 자동차를 힐끗 바라보기도 하고,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 안의 운전자는 운전대 위에 얹어 놓은 손을 까딱하고 들어올려 내게 인사를 한다. 나도 모르게 해묵은 팝송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존 덴버(John Denver)의 컨트리 로드를 부르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골길이 있을까?

호주 태즈마니아주의 한 섬에 들어선 케이프 위컴 16번홀 그린 /오상준
호주 태즈마니아주의 한 섬에 들어선 케이프 위컴 16번홀 그린 /오상준

자석에 끌리듯 시작된 혼자만의 라운드

골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반.  해는 아직도 중천에 걸려있고 일몰까지는 4시간도 더 남았다. 직원 둘이 지키고 있는 클럽하우스에 들어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멀리 160년을 견뎌온 하얀 등대가 보이고 그 앞에는 거대한 스케일의 페어웨이가 펼쳐져 있었다. 이대로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들어가는 건 용납이 되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었다.

"지금 나가서 라운드를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이지. 아마 지금 밖에는 너 말고 한 8명쯤 있을 거야.  그런데 저녁식사를 하러 7시반까지는 들어와야 하니, 18홀을 다 치기보다는 11개 홀만 치고 돌아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예정에 없던 라운드를 위해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음날 오전 오후 두 번에 걸쳐 라운드를 할 예정이었지만, 시속 45킬로미터의 강풍이 하루 종일 분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제대로 된 골프를 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바람이 잦아들었을 때 이 곳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명물허전’이라 했던가? 케이프 위컴은 세계 70위의 위상에 걸맞는 광활한 스케일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흩날리고 있는 붉은 깃발은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의 가슴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것 같았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린 페어웨이는 그 위에 자라고 있던 관목과 지피(地被) 식물들을 걷어내고 페스큐(Fescue) 잔디씨를 뿌려 만들었고, 홀의 최종 목적지인 그린 주변으로 벙커 몇 개를 파 놓고 그린의 굴곡을 섬세하게 빗어 놓은 게 전부였다. 풍경화와 같은 캔버스의 여백을 채워 넣은 건 푸른 하늘 위에 동동 떠 있는 구름과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파도였다.

케이프 위컴 18번홀 /오상준
케이프 위컴 18번홀 /오상준

이 곳에서는 골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혼자 골프를 쳐 본 사람만이 아는 마음의 평화가 있다. 이는 다른 곳에서 얻는 평화로움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대자연 속에 사람의 손으로 어루만져 놓은 페어웨이를 따라 하얀 공 하나를 쫓아가는 여정은 마치 산티아고 성지 순례길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넓은 대자연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신선한 공기를 몸 안에 순환시키다 보면 정신이 또렷해지며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잡념이 들어설 공간은 사라지고 머릿속엔 목표까지 남은 거리를 계산하고 반복된 스윙을 하는 일념만이 남는다. 혼자 하는 골프는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바람이 함께한다면 더욱 좋다. 바람 속에 남은 건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뿐이고, 이마저도 가끔 들려오는 음악과 같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의 태양빛이 페어웨이와 그린에 아름다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동안 라운드를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왔다. 어땠냐는 직원의 질문에 내가 한 대답은 간단했다.  

"Beautiful 아름다웠어."

 

 

오상준 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대표

한국인 최초로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학에서 골프코스 설계 부문 석사 및 컬럼비아대 건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송도 잭니클라우스골프클럽 조성공사 등에 참여했다.

2015 프레지던츠컵과 더CJ컵 국제대회 운영을 담당했으며, 미국 GOLF매거진 세계100대코스 선정위원, 싱가폴 아시아골프산업연맹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골프에세이 '골프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면'을 출간했고, 유튜브 '마이 골프 레시피'와 강연 등을 통해 다양한 골프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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