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속어' 발단 된 글로벌펀드 1억 달러
적립금 부족으로 내년 정부 예산 반영
환율 급등에 720억원, ODA 사상 최대
외교부 "국회 승인 안 되면 국제 망신"

"(미국) 국회에서 이 ⅩⅩ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미국'이란 두 글자가 괄호로 처리된 한 줄의 자막이 여·야의 극한 대결을 부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과 만남 직후 언급한 혼잣말이 MBC 방송을 통해 미국 의회 비하 발언으로 보도되면서 정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다.
애초 논란을 부른 건 MBC가 윤 대통령의 발언 영상을 보도하면서 영상에는 없었던 '(미국)'이란 자막을 자의적으로 삽입한 데서 비롯됐다. '(미국)'이란 자막 때문에 시청자로선 윤 대통령이 미국 의회를 향해 막말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야당도 이를 받아 '외교 참사'로 몰아붙였다.
음성 분석 전문가에 첨단 장비까지 동원해 여야가 극한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정작 당시 발언이 나온 맥락에 대해선 야당은 물론 여당조차도 따져보지 않고 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22일 뉴욕에서 열린 '제7차 글로벌펀드 재정공약회의' 참석 직후 나왔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국이 내년부터 3년 동안 1억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공약했다. 1억 달러는 2020~2022년 3년 동안 한국이 내기로 한 기부금의 4배에 달하는 규모다. 일본이나 독일에 비해선 턱없이 작은 액수지만 과거에 비해선 크게 증액된 액수였다.
이번 회의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주재했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고문 등이 참석한 이번 회의에서 바이든은 142억5715만 달러의 출연을 약속받았고 이를 본인의 치적으로 홍보했다.
지난 21일(현지시각) 뉴욕에서 개최된 \'제7차 글로벌 펀드 재정공약회의\' 동영상. 윤석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향후 3년간 1억달러의 공적개발원조를 약속헸다. /NowThis News 유튜브
이런 맥락을 감안하면 윤 대통령의 발언이 미국 의회를 겨냥한 것으로 보도한 MBC의 자막은 앞뒤가 맞지 않다. 바이든이 주재한 국제회의에서 한국이 1억 달러라는 거액을 국제기구에 기부하겠다고 공약했는데 미국 의회가 승인을 하고 말고 할 이유도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의 발언은 대통령실의 해명대로 한국 국회를 지칭한 것일까. 당초 한국이 약속한 '글로벌펀드'의 재원은 국내에서 출국자에게 1인당 1000원씩 거둬 적립해온 '국제 빈곤 및 질병 퇴치 기여금'으로 충당해왔다. 정부 예산을 쓰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이는 국회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해외 여행객이 급감하면서 기여금 재정이 바닥 났다. 이로 인해 2020~2022년 약속한 2500만 달러 중에서도 887만 달러를 연체하게 됐다. 정부는 적립 기금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글로벌펀드'를 나랏돈으로 부담하는 '국제기구 사업분담금'으로 전환해 충당하기로 했다.
28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윤 대통령이 향후 3년간 1억 달러(현행 환율 적용 시 1440억원) 지원을 약속한 '글로벌 펀드' 출연금 가운데 절반인 5000만 달러(지난 8월 편성 환율 1290원 적용 시 645억원)를 국제기구 사업분담금으로 내년 예산에 반영했다. 그 사이 환율이 폭등해 현재 기준으론 720억원으로 공적개발원조(ODA) 역사상 최대 규모가 됐다.
이에 따라 윤 대통령이 바이든 앞에서 한 1억 달러 기부 약속을 지키자면 한국 국회에서 내년 국제기구 사업분담금 예산안을 원안대로 승인해줘야 하게 됐다. 이 같은 맥락으로 보면 윤 대통령의 발언이 한국 국회를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런데 MBC의 자막으로 윤 대통령의 발언이 '외교 참사' 논쟁으로 비화하면서 정작 글로벌펀드 재원 마련에 대한 논의는 실종된 상태다.
글로벌펀드는 에이즈·말라리아·결핵 등 질병 퇴치를 목표로 시민단체인 GFAN(Global Fund Advocates Network)가 주관하는 국제 구호기금이다. 한국은 지난 2018년부터 해당 펀드의 집행이사회 이사국으로 참가해오고 있다.
지난 6년 간 글로벌펀드에 한국 정부가 공여한 금액은 미납부액 887억원을 포함해도 2863만 달러에 불과해 24개국 중 20위로 최하위권에 속한다. 앞서 GFAN 아시아 태평양 본부는 한국에 "기여금을 한국 경제 수준에 맞게 증액해주길 바란다"고 요청했고, 윤 대통령은 이날 기조연설에서 "대한민국은 앞으로 3년 동안 총 1억 달러를 기여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여성경제신문이 제7차 회의 모금 결과를 분석한 결과, 미국이 60억 달러로 가장 많았고 유럽연합(EU)이 42억 달러로 뒤를 이었다. 독일 20억 달러, 캐나다 13억 달러, 일본 10억8000만 달러, 프랑스 3억 달러 순으로 이어졌다. 윤 대통령이 약속한 1억 달러는 48개의 참가국 중 13번째로 큰 규모였다.
민간 부문에선 빌앤멜린다 게이츠 재단(9억1200억 달러), 일본 다케다제약(3억7600만 달러) 등 한국 정부가 2020년부터 2022년 6년 동안 낸 기여금의 두 배가 넘는 규모로 참가하는 단체도 보였다.
외교부에 따르면 글로벌펀드에 대한 다자간 원조는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에도 도움이 된다. 2019년부터 2022년 3분기까지 한국 기업이 글로벌펀드에 물건을 판 금액은 4억6000만 달러로 총지원금의 16배가 넘는다.
더욱이 그동안 국제기구의 지원으로 경제 발전을 해온 한국으로선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하는 게 국격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10대 경제 대국이라는 한국이 빌 게이츠라는 개인 재단이나 일본의 일개 제약사보다도 적은 기여금을 내는 게 국격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현미주 외교부 다자협력인도지원과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정부 예산을 안 쓰면 더욱 좋겠지만 문제는 질병퇴치 기금 상황이 열악해 더는 늘릴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며 "이에 따라 정부 예산이 들어가는 국제기구 분담금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오래 전부터 준비해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글로벌펀드'가 '비속어' 논란으로 정쟁의 대상이 되는 바람에 글로벌펀드 재원 마련을 위한 예산안이 한국 국회를 통과할지는 극히 불투명하게 됐다. 현재로선 야당이 윤 대통령의 글로벌펀드 공약을 '외교 참사'로 몰아붙이고 있는 형국이어서 관련 예산 삭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김재천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여야의 정치적 입장이야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국제기구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선 경제력에 걸맞는 기여 외교를 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라며 "정치권이 당리당략을 떠나 국익의 관점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판단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