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화 내용 따라 처리-후-처분 갈림길
4세대 소형원자로 개발에도 영향 미쳐
300년 중준위 폐기물로 소멸처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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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에너지 전환'은 전 세계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신재생 에너지나 석탄·천연가스 발전만으로 탄소중립을 실현하겠다는 건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좇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원자력 발전은 청정 에너지이지만 '후쿠시마'라는 트라우마가 늘 따라다닌다. 청정 에너지와 안전이란 평행선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인류에 새 가능성이 열렸다. 바로 '소형 원자로(SMR)'다. SMR은 작은 용기 안에 원자로와 냉각기를 일체형으로 넣은 발전 시스템이다. 일체형이어서 폭발 위험성이 제로에 가깝다. 만에 하나 사고가 나도 소형이어서 피해는 제한적이다. 원전 선진국인 한국은 일찌감치 SMR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탈원전' 도그마에 빠져 수년을 허송했다. 그 사이 미국·중국·러시아 등 세계 각국이 앞다퉈 SMR 개발과 상용화에 뛰어들었다. 늦었지만 한국에 기회가 없는 건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원전 건설이나 운영 경험을 많이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여성경제신문이 본격화되는 소형 원자로 전쟁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한국의 가능성을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①탄소중립 시대, 소형원자로가 답이다 |

땅에 묻을 것인가? 불태워 없앨 것인가?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특히 유럽연합(EU) 택소노미(Taxonomy)가 오는 2050년까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을 갖출 것을 요구하면서, 이에 맞추려면 정부가 중심을 잡고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자력 발전에 사용되는 우라늄-235는 핵분열 시 플루토늄, 세슘, 스트론튬 등 방사성 물질로 바뀐다. 이 가운데 방사능 준위가 낮은 원전 시설 및 도구를 보관하는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은 2005년 경주에 건립된 바 있다.
먼저 박근혜 정부가 2016년 '고준위 폐기물 처리방안 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 방법을 통한 사용후핵연료 처분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를 뒤집어 재검토위원회를 열고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윤석열 정부는 현재 이를 이어받아 특별법 발의를 추진하고 있다.
원전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 관리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원전 내에 저장(Pool)하는 방식이다. 아울러 핀란드·스웨덴·독일·캐나다·스페인·미국·루마니아는 경주와 같은 방폐장을 건설해 땅에 묻는 방식으로 직접-처분하기도 한다.

프랑스·영국·일본은 이보다 더 진화된 처리-후-처분 방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 프랑스는 국내 원전에서 발생하는 사용후핵연료 뿐만 아니라 독일(5482t), 일본(2944t), 스위스(771t), 스페인(673t), 네덜란드(431t), 이탈리아(193t)의 사용후핵연료를 위탁처리하는 나라로 유명하다.
직접-처분 방식을 따를 경우 정부가 땅에 묻은 핵물질을 지키기 위해 30만년을 보초를 서야 한다. 사용후핵연료에서 방출되는 방사능이 자연방사능 수준으로 줄어들기 까지는 20만~30만년의 반감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한 것인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로 무게의 약 1%에 달하는 플루토늄을 회수해 핵연료로 만들고 남은 5% 부피의 고준위폐기물은 영구처분장에 보관할 수 있다.
NPT로 '습식 재처리' 길 막힌 한국
파이로프로세싱이 유일한 돌파구
보초 설 기간 '1000분의 1'로 줄여
다만 재처리를 통해 얻은 플루토늄은 순도가 높아 원자탄으로 전용될 수 있기 때문에 엄격한 국제사회 규제를 받는다. 한국은 1974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과 1975년 가입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라 미국 동의 없이는 재처리와 농축을 할 수 없는 국가로 분류된다.
즉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물을 사용하는 습식 재처리가 아닌 액체금속으로 태워서 없애는 건식의 파이로프로세싱이다. 이를 통하면 반감기를 300년으로 줄이는 동시에 중준위 폐기물로 독성을 크게 낮추는 것도 가능해진다.
파이로(Πυρος)는 태운다는 뜻의 고대 그리스 용어다. 성경의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불과 유황(Fire and brimstone)의 못(Lake)으로부터 유래됐다. 사용후핵연료를 못과 같은 액체금속 고속로(Liquid metal fast reactor)에 넣어 태워져 없어질 때까지 태우는 것을 파이로 공정이라고 한다.

파이로프로세싱을 통하면 고방사능 물질인 세슘과 스트론튬을 별도로 떼어내고, 재활용 핵연료인 플루토늄 등 초우라늄 혼합물을 회수할 수 있다. 이전엔 핵연료의 5% 정도만 활용하고 전체가 폐연료봉으로 배출됐는데, 나머지 95% 초우라늄 혼합물을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를 액체금속 고속로에서 태워 없애는 과정에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4세대 소형모듈형원자로(SMR)다. 한마디로 파이로프로세싱과 4세대 SMR은 동전의 앞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물을 매개로 하는 습식 재처리와는 달리 파이로프로세싱을 통해 건식 처리하면 플루토늄이 초우라늄 혼합물과 섞여 나오는데 이를 분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기술의 핵심이다. 또 태우는 과정에서 핵연료 내의 초우라늄 원소들은 핵분열 반응을 거치며 다른 핵종으로 변환되면서 독성이 낮은 물질이 된다. 이를 위한 대표적인 장치가 액체금속냉각고속로(LMFR)로, 소듐(Sodium)을 이용한 한·미간 공동 연구에 탄력이 붙고 있다.
파이로와 4세대 원전은 동전의 앞뒤
미국도 SMR 선도국 되기 위해 사활
지난해 7월 한·미 원자력연료주기공동연구(JFCS) 운영위원회가 10년에 걸친 연구 경과를 보고했다. 이어 윤석열·바이든 대통령이 5월 열린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통해 △사용 후 핵연료 관리 △원자력 수출 진흥 △연료 공급 확보 △핵안보를 위한 협력 강화를 위한 한-미 원자력 고위급위원회(HLBC)를 재가동키로 했다.
미국은 동아시아 핵확산 가능성을 이유로 한국의 '사용후핵연료 습식 재처리 가능성'을 우려해 왔다. 그러나 에너지 안보를 둘러싼 국제 정치 지형이 급변하면서 건식 방식엔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SFR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파이로프로세싱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것이 증거다.

땅이 넓어 직접-처분 방식을 선호해온 미국내에서도 변화 바람이 불고 있다. 우라늄의 88%를 러시아를 비롯한 해외에 의존해온 미국은 바이든 정부 들어 에너지부(DOE) 산하 에너지고등연구계획국(ARPA-E)을 통해 사용후핵연료의 방사성동위원소를 에너지로 전환하는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의 움직임엔 4세대 소형모듈형원자로(SMR) 선도국이 되겠다는 의도가 깔렸다. 경쟁국 러시아는 발화하기 쉬운 소듐고속로의 단점을 극복한 납냉각고속로(RF Liquid Lead)를 일찌감치 개발해 전력 생산에 이용하고 있다. 사용후핵연료 처리가 엄격한 규제를 받아온 동안 4세대 원자로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 핵연료 무교체를 위한 연구개발 경쟁까지 나아갔다.

尹에 파이로 내용 빼고 보고한 산업부
과기부와 엇박자, 원자력계 내부 갈등
국민 지지 얻으려면 조직 일원화부터
반면 한국에선 저장시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용후핵연료 축적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경북 경주 월성원전 1~4호기 포화율은 100%에 육박해 다른 보관 장소를 물색하기 바쁘고 경북 울진 한울1~6호기, 부산 기장 고리1~4호기와 신고리 1·2호기는 90%에 육박, 전남 영광 한빛1~6호기는 80%를 넘어설 전망이다.
한국의 사용후핵연료 관리가 늦어진 데는 정부 부처간 엇박자와 원자력계 내부의 이해관계 갈등이 주된 원인이다. 다시 말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이 파이로프로세싱에 우호적인 반면,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은 당장 땅에 묻는 것을 선호해왔기 때문이다.
과기부가 지난해 12월 '제10차 원자력진흥위원회'에서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을 계속 개발하기로 의결했음에도, 산업부는 같은 달 '제2차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를 반영하지 않았다. 다만 운영상 여건 변화에 따른 고준위 방폐물 회수 가능성도 고려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이런 결과 원자력계 내부에서도 '직접 처분파'와 '처리-후-처분파'가 충돌하는 양상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강정민 박사는 지난 7일 국회 보좌진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에서 "현재 미국 정부는 파이로프로세싱을 재처리로 간주한다"면서 "추출된 우라늄의 경우 방사선이 미약해서, 테러단체의 탈취·전용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반면 여당에선 김영식·한무경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을 중심으로 "파이로프로세싱 기술개발 방안을 방사성 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에 포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를 위해 정범진 경희대학교 원자력공학과 교수, 구정회 한국원자력연구원 핵주기환경연구소장 등을 초청해 사용후핵연료 처분 및 파이로프로세싱 지원방안 토론회를 갖기도 했다. 당시 패널로 참석한 정용훈 카이스트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가 대통령직인수위에 의견을 전달했으나 산업부는 업무보고 과정에서 파이로프로세싱을 삭제한 내용을 윤석열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여성경제신문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문건을 단독 입수해 확인한 결과 산업부가 제2차 고준위 관리 기본계획의 법제화 계획을 윤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문건엔 파이로프로세싱 관련 내용이 빠져 있었다. (한덕수) 국무총리 산하 고준위 방폐물 관리 정책 이행을 위한 전담조직 신설 계획이 담겼을 뿐이었다.
산업부의 이 같은 일방 독주 행태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파이로프로세싱'을 강조하며 미국 바이든 대통령과도 연구 협력을 약속한 윤 대통령 뜻과도 충돌하는 지점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은 인수위원회 당시 윤 대통령에게 파이로프로세싱 기술개발 방안을 보고한 바 있다.
또 이 같은 논쟁은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자리 쟁탈전으로까지 확전되고 있다. 한수원 임원추천위원회는 지난 1일 유연백 민간발전협회 상근부회장, 이종호 전 한수원 기술본부장,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조병옥 전 한수원 품질안전본부장, 황주호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등 5명의 숏리스트를 선정했다.
기획재정부 공공기관운영위원회가 한수원 주주총회에 올릴 2명을 선정하는 작업이 남은 가운데, 후보들의 성향 차이도 보인다. 최재형 의원 측근으로 알려진 황주호 교수는 '직접-처분'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윤석열 캠프 원자력·에너지정책분과장으로 활동해온 주한규 서울대 교수와 함께 학계에서 탈원전 반대의 선봉에 섰던 정범진 교수는 '직접-처분'과 함께 '처리-후-처분'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쪽이다.
원자력계 내부에서조차 입장차가 첨예해지면서 정부가 이원화된 부처를 일원화하고 당장의 법제화보다는 국민과의 소통에 더 힘을 써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원자력 정책 총괄 부처가 2개인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정부 행정기관인 에너지부(DOE)가 원자력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DOE는 원자력 기술 개발과 원자력 사업을 전략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그 산하에 서로 경쟁하는 20여 개 국립연구소를 두는 방식이다.
정동욱 한국원자력학회장은 "미국과의 공동연구 작업을 통해 기술적 타당성까지 합의에 이른 것이 의미 있는 포인트"라며 "앞으로는 국가 차원에서 파이로프로세싱을 필요한 기술로서 인정하고 지속하겠다는 컨센서스(공감대)를 만드는 게 중요해 보인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연구개발하는데 법은 없어도 된다. 법적으로 어떻게 할지 여부는 후순위 논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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