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봉 내동댕이친 이원욱 과방위원장, 집권당 오만함 보여주며 국민 모독
민주당의 정의란 선택적·상대적·일방적 정의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 존재 

지난 23일 국회에서 열린 과방위 국정감사에서 이원욱 위원장이 야당 위원과 언쟁 끝에 의사봉을 내팽개쳐 도를 넘은 행동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사진은 지난 1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과방위의 정보통신산업진흥원, 한국인터넷진흥원 등에 대한 영상 국정감사에서 이원욱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 23일 국회에서 열린 과방위 국정감사에서 이원욱 위원장이 야당 위원과 언쟁 끝에 의사봉을 내팽개쳐 도를 넘은 행동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사진은 지난 1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과방위의 정보통신산업진흥원, 한국인터넷진흥원 등에 대한 영상 국정감사에서 이원욱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는 모습. /연합뉴스

 

오늘(10월 26일) 2020년 국정감사 일정이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 21대 국회 출범 이후 첫 국감이었던 만큼 큰 기대를 모았지만 정부의 실정은 크게 부각이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으레 한두 명 나오긴 마련인 야당의 국감 스타도 이번에는 거의 전무했습니다. 야당의 전투력이 상당히 약화된 측면도 있지만, 과반수에 이르는 집권여당의 증인 배제 김빼기 전략이 주효했던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필자는 이번 국감에서 ‘윤석열’과 ‘이원욱 의사봉 내동댕이’가 가장 머릿속에 남습니다.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 언급한 바 있어서 넘어가고,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 논란을 통해 집권여당의 행태에 대해 한번 짚어보려고 합니다. 이원욱 의원은 비교적 젊은 나이(1963년생)에 경기도 화성시을에서 3선을 한 중진 정치인입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의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전임 박광온 위원장이 민주당 사무총장으로 빠져나가면서 ‘운 좋게’ 상임위원장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의 이력을 보면 2006년 독도수호국제연대 대외협력위원장이 첫 공식 대외 타이틀로 돼 있습니다. 2011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기획위원회 위원으로 정치에 발을 디뎠고 그 다음해인 2012년 민주통합당 경기도당 화성시을 지역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19대 총선에서 당선돼 3선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난 23일 국회에서 열린 과방위 국정감사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과방위원장과 야당 간사인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은 시정잡배들이나 할 법한 말싸움과 추태를 연출했습니다. 고성과 약간의 욕설이 오가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이 위원장이 박성중 의원에게 보란 듯이 의사봉을 들입다 내동댕이친 것은 분명 도를 넘는 행동이었습니다. 국민이 의사의 원활한 진행을 하라고 쥐어준 의사봉을 개인의 분노 표출을 위한 소도구로 쓴 이 위원장의 행태는 야당 무시를 떠나 국민에 대한 심각한 모독입니다. 국회가 신성할 것까지는 없지만, 의사봉을 위원장의 개인 ‘무기’처럼 착각하고 마구 내던져버린 행태는 국민들에게 심한 모멸감을 안겨준 것이라고 봅니다. 

왜 정치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죠. 이 위원장의 발언 중에는 ‘위원장을 인정해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야당이 위원장을 계속 무시한다는 것이죠. 1958년생인 박성중 의원이 1963년생인 이 위원장에게 ‘나이어린 XX가’ 운운한 것도 위원장을 무시했다는 정황이 될 수도 있겠네요. 왜 이 위원장은 특히 야당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근원(近原)은 아마도 21대 국회 개원 뒤 벌어진 민주당의 상임위원장 싹쓸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민주당은 지난 6월 5일 국회의장과 부의장 1석, 지난 15일 6개(법제사법·기획재정·외교통일·국방·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보건복지) 상임위원장에 이어 6월 29일 본회의에서 나머지 11개 상임위원장을 자당 몫으로 선출해버렸습니다. 여당이 상임위원장을 ‘독식’한 건 1987년 5월 12대 국회 후반기 이후 33년 만입니다. 야당 몫 부의장 1석이 공석이긴 하지만, 국회의장·부의장·상임위원장 전석을 여당이 가져가는 건 한국 헌정사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야당은 이에 대한 감정적 앙금이 아직도 짙게 남아있습니다. 그동안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총선 결과에 따라 제 1당의 지위를 번갈아가며 누렸습니다. 상대가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도 상임위원장 배분이나, 특히 법사위원장의 야당 의원 배정이라는 나름대로의 ‘협치’가 작동해왔습니다. 대통령은 비록 바뀌어도 국회에서의 ‘정치 문화’는 그렇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카메라만 돌면 서로 얼굴을 붉히고 싸우지만 저녁에 술자리에서는 ‘형님 동생’ 하며 그들만의 국회권력을 나눠먹기 해왔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같은 국회의원이다’라는 강한 연대감, 한솥밥을 먹는 정치집단 특유의 ‘끼리끼리 문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21대 국회는 이런 ‘절친 관계’와 묵계가 깨진 첫 국회입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재난’을 당한 국민의 힘은 대선-지방선거-총선 3연패를 당하며 당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민주당은 다수석의 힘을 무기로, 총선에서의 압승 민의를 구실로, 전례없는 상임위원장 독식을 밀어붙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렇게 타협을 위한 열정을 쏟아 붓지도 않았습니다. ‘국민들이 일하는 국회를 만들라고 한다’며 그냥 밀어붙였습니다. 이에 대한 야당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권만 바뀌면 보자는 오기와 분노가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국정감사는 야당의 시간입니다. 야당의 1년 농사는 바로 이 국감에서 그 결실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숨기고 찾아내는 자, 쫓고 쫓기는 자들의 난타전이 불을 뿜습니다. 역대 야당은 이 국감을 통해 정치적 존재감을 과시하고 힘의 균형점을 찾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국감은 ‘윤석열’과 ‘드잡이질’만 기억날 뿐 그야말로 맹탕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민주당이 유도했던 측면도 있습니다. 민주당은 국감 이전부터 “민생국감·정책국감을 하겠다”며 야당의 정치적 공세가 예상되는 정치현안이나 민감한 이슈에 대해서는 의제 자체가 도마에 오르는 것 자체를 원천차단 했습니다. 국감 직전 불거진 ‘해수부 공무원 피살사건’ ‘윤미향 사태’ ‘박원순 성추행 의혹’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들 사건과 관련한 일반증인의 채택을 막았고, 최근 뜨거운 라임·옵티머스 사태 역시 야당이 요구하는 증인은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의혹의 중심축에 있던 청와대 행정관의 국감 증인 출석도 막판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불발됐습니다. “수사 중인 사안” “정쟁이 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증인 채택 불가가 이어졌습니다. 이는 18개 상임위원장을 차지한 거대여당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소수당으로 전락한 국민의힘의 손발까지 묶어버린 것입니다. 국감 내내 야당 의원들은 무기력했고 이에 대한 스트레스 또한 심했을 것입니다. 물론 야당의 능력 부족이 1차적 원인이긴 합니다. 하지만 힘이 떨어져 있고 당도 비상대책위 체제인 약한 야당을 배려하는 집권여당의 모습 또한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정치가 이렇게 삭막해졌나’ 하는 목소리는 지난 총선을 기점으로 더 크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원욱 과방위원장의 의사봉 팽개침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집권여당이 힘 빠진 야당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 와중에도 자기들의 권익과 위상은 모두 대접받으려 하는, 선 넘은 탐욕이 더 크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야당의 증인 채택 요구는 국민의 이름으로 거부하고 그에 항의하는 야당 의원들에게는 수준 높은 정치문화를 요구하는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태가 바로 이원욱 위원장에게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박성중 의원이 잘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국감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아마 야당의 필사적이고 정무적인 전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국정운영의 책임은 여당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들먹인 것도 꼰대질의 전형입니다. 그럼에도 약자가 강자를 배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가질 것 다 가진,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고 누릴 것 다 누리고 있는 집권여당이 조금이라도 양보하고 심기를 죽여야 합니다. 그 상황에서 똑같이, 오히려 의사봉을 팽개치며 극도의 분노를 더 극렬하게 표현한 집권여당 상임위원장의 행태는 크게 비난받아야 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원욱 위원장은 그 뒤 그 어떤 유감 표명이나 사과도 없었습니다. 국민이 보기에 눈살을 찌푸릴 정도가 아닌, 무례하고 저질스러운 행동을 한 집권여당 위원장의 행태에 대해 그 어떤 이도 나서서 이에 대한 해명이나 유감도 표하지 않습니다. 그냥 ‘정치가 이렇게 막장이구나’, 국민들의 박탈감만 더 커질 뿐입니다. 이원욱 위원장의 행태가 비록 한 개인의 행위일 수 있지만, 이를 통해 현재 민주당의 오만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민주당에게서 ‘탄핵받은 당(정치세력)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공중분해 시키자’는 비타협, 일방독주의 정서를 읽게 됩니다. 이해찬 전 대표의 20년 장기집권은 결코 그의 주관적 생각이 아닙니다. 민주당에 퍼져 있는 국민의힘에 대한 불신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진보논객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지난 25일 신작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에서 "문재인 정권의 거의 모든 게 내로남불"이라고 비판했다. 사진은 2019년 6월 21일 KBS전주 특별기획 '청년에게 말하다'에 출연하여 강연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KBS전주 방송화면 캡처.
진보논객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지난 25일 신작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에서 "문재인 정권의 거의 모든 게 내로남불"이라고 비판했다. 사진은 2019년 6월 21일 KBS전주 특별기획 '청년에게 말하다'에 출연하여 강연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KBS전주 방송화면 캡처.

 

현재 민주당에게 과연 정치란 무엇일까요? 그들이 말하는 공정과 정의란 무엇일까요? 정치는 경쟁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대성의 게임입니다. 그 경쟁자(적)의 위상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것이 공정한 게임의 첫 출발입니다. 지금 민주당에게서 과연 적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진보 논객인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지난 25일 신작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에서 “문재인 정권의 거의 모든 게 내로남불”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강 교수는 책에서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사례를 일일이 정리하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며 “굳이 지적할 것도 없이 거의 모든 게 내로남불이었기 때문”이라고 일갈했습니다.

강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자신들의 잘못을 극우 보수보다 사소하게 보이게 함으로써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장기 집권을 꾀하는 전략을 취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은 착하고 선한 이미지로 지지자들의 사랑을 받는 역할을 한다”며 “정권의 실세나 실세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은 선과 정의의 이름을 앞세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거칠게 공격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권력 유지에) 자기 성찰과 책임 의식은 필요 없다. 상대를 열심히 두들기면 된다”며 “(권력과 관련된) 허영심이 작동하면 정치인들은 연기하는 배우가 되는데, 더불어민주당은 허영심 경쟁을 벌이고 있다. 쓴소리하는 극소수 의원들에겐 몰매를 준다”고도 했습니다. 강 교수는 이 저서에서 ‘왜 개인과 집단은 권력을 누리면 달라지는가?’를 화두로 권력의 속성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서구 정치 철학자들의 분석에 정치 역사 사례들을 더해 권력의 부패 과정을 현재 한국 정치에 빗대며 설명했습니다. 살아 있는 권력 민주당이 반드시 이 저서의 내용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나치 정권의 부역자’로 알려진 독일의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는 한국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의 주장 핵심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는 명제입니다. 도덕적인 것에는 ‘선과 악’의 대립, 미학적인 것에는 ‘미(美)와 추(醜)’의 대립이 본질적인 잣대가 되듯 ‘적과 동지’ 구별이 정치 행위의 냉철한 본질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만큼 한국 정치에 잘 맞아떨어지는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친문세력들의 ‘피아 구분’ 발언도 슈미트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탈당한 금태섭 전 의원을 향해 친문들이 쏟아낸 야멸찬 독설이 이런 분위기를 잘 말해줍니다.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몰아 저주를 퍼붓습니다. 금 전 의원이 지적한 민주당의 가장 심각한 행태는 바로 ‘편가르기’(피아 구분)였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은 친일파(토착왜구)로 몰아 사람을 난도질합니다. 이를 비판하면 ‘내부 총질’이라며 몰아세우고, 문자폭탄과 악플의 좌표를 마구 쏘아댑니다. 

진보성향 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생각을 비판하면서 ‘슈미트와 닮았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최 교수는 “조국의 정치관은 ’진보vs보수‘ ’개혁vs수구‘ ’아(나)vs타(적)‘ 사이의 치열한 투쟁을 통한 권력쟁취를 지향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조국의 그런 생각이 문제인 정부의 정책방향을 이끌어왔다고 판단했습니다. 최 교수는 이런 생각을 가질 경우 ‘정치에서 도덕이나 정의 공정과 같은 구분은 무의미해진다’고 했습니다. ‘내편이냐 아니냐’만 중요해지는 것이죠. 내편이면 부도덕하고 불공정해도 ‘묻지마 보호’를 해주는 행태가 그런 시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민주당의 정의는 선택적 정의입니다. 민주당 박범계 의원이 대검 국정감사 때 “안타깝게도 윤 총장이 가진 정의감, 동정심에 의심을 갖게 됐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윤 총장은 “선택적 의심 아니냐. 과거에는 저에 대해 안 그러지 않았느냐”고 반발한 바 있습니다. 민주당에게서 정의란 절대선의 가치가 아니라 우리 편과 적을 나누는 일종의 자의적인 선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유리한 것은 정의라고 말하면서 불리한 것은 정략적이라고 비판하는, 선택적 정의 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민주당의 정의는 상대적 정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의롭지 못해도 국민의힘보다는 정의롭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화 운동을 하며 사회에 헌신을 하는 사이 국민의힘 세력은 기득권층에서 누릴 것 다 누리며 편안하게 살았다’는 도덕적 우월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의 정치세력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모두 토착왜구의 후예이기 때문에 끝까지 박멸시켜야 하는 ‘기생충 같은 집단’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민주당은 아무리 잘못을 해도 태생적으로 국민의힘보다 도덕적 우월성과 역사적 정의감이 있기 때문에 용서가 된다는 의식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과오’도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못해도 국민의힘보다 더 못하지는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아는 한 민주당 당직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최근의 부동산 가격 폭등도 지난 정권의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이 하루아침에 약발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후유증도 오래간다. 박근혜 정권이 잘못 해놓은 것을 우리가 지금 만회하는 것이니 우리 책임이 없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상당히 놀랐습니다. 무책임함을 떠나 민주당 정서 속에 흐르는 상대적 정의감이 그들의 실책마저도 면죄부를 주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당의 정의는 일방적 정의이기도 합니다. 친문이면 모두 용서가 됩니다. 진영논리라는 일방통행만을 고집합니다. 친문이라는 강한 동류의식은 그 어떤 도덕적인 결함이나 실책이 있다고 해도 모두 용서가 됩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친문은 아니지만, 그의 자살이 몰고 올 정치적 역풍을 의식해 친문은 박 전 시장의 자살을 ‘정치’(민주당)와 연결시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성추문 시장이 국민의힘 출신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좌표를 찍어 아마 가루가 되도록 그 주변인들을 몰아세웠을 것입니다. 친문의 일방적 정의는 바로 ‘내로남불’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일방적 정의는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친문은 남들이 무어라 하거나 말거나 2022년 대선에서 또 권력을 차지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종 커뮤니티에서 친문에 반하는 글이 올라오면 즉시 벌떼같이 달려들어 그 글을 악성댓글로 도배질해 초토화시킵니다. 여기에 어떤 토론의 미덕이나 의견의 존중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 편이 아닌 것이 확인만 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까내려 갑니다. 그들에게 정의란 ‘우리 편’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두 가지 규범을 상호 관용과 이해, 그리고 절제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상호 관용과 이해란 정치라는 게임에서 상대를 나의 경쟁자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절제는 그런 존중 아래서 인내의 미덕을 발휘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와 규범이 없다면 정치판은 시정잡배들이나 벌일 법한 막장 드라마일 뿐입니다. 

이원욱 과방위원장이 보여준 위원장에 대한 존중과 인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신성한 의사봉을 내동댕이쳐 나오는 것이라면 국회의 18개 상임위원회 의사봉들은 남아나는 게 없을 것입니다. 존중받으려면 먼저 상호 관용과 이해, 그리고 절제의 미덕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마저도 ‘우리 편’들에게는 ‘헛소리’로 들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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