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시장'이란 경제원칙이란 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
낡은 자전거 안장과 핸들로 만든 피카소 '황소 머리' 참가치는?

1880년 제작된 에두아르 마네의 ‘아스파라거스(Asparagus)’. 마네는 ‘200프랑 어치’라며 받는 이에게 밝혔다. 1880, 캔버스에 유채, 21 x 16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1880년 제작된 에두아르 마네의 ‘아스파라거스(Asparagus)’. 마네는 ‘200프랑 어치’라며 받는 이에게 밝혔다. 1880, 캔버스에 유채, 21 x 16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에두아르 마네’ 하면 다들 아실 테다. 19세기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가 아닌가. 문제작인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에 벌거벗은 여자를, 그것도 한해 걸러 한 번씩 그림에 등장시키는 바람에 예의 바른 파리 시민들의 울화통을 건드린 사내가 마네다. 배짱 두둑했던 마네도 만년에 도발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좀 수굿해졌다. 까칠한 화가에서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로 변했다고 할까.

이런 얘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마네는 컬렉터에게 정물화를 주문받았다. 물론 그가 엔간히 이름을 알리고 난 뒤다. 별 고민 없이 붓을 놀려 아스파라거스 한 묶음을 후딱 그려 보냈다. 애초 그림값은 800프랑으로 약속했었다. 받아본 작품이 맘에 들었는지 컬렉터가 1000프랑을 보내주었다. 마네가 괜히 켕긴 모양이다. 선심 쓰듯이 소품 한 점을 더 그려주었다. 컬렉터가 기뻐하며 포장을 뜯어보니, 아스파라거스 딱 한 줄기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계산해보면 금방 나온다. 줄기 당 200프랑인 아스파라거스다. 이 예화를 두고도 윤똑똑이들은 혹 반박할지 모르겠다. “아니, ‘그림의 떡’ 아닌가? 아스파라거스가 무슨 환금성이 있다고.”

빈센트 반 고흐의 ‘게 두 마리(Two Crabs)’. 그림 속의 게가 누군가의 초상화라고 말한 이도 있었다. 캔버스에 유채, 47 × 61cm, 런던 내셔널갤러리 위탁 보관.
빈센트 반 고흐의 ‘게 두 마리(Two Crabs)’. 그림 속의 게가 누군가의 초상화라고 말한 이도 있었다. 캔버스에 유채, 47 × 61cm, 런던 내셔널갤러리 위탁 보관.

하나 더 찾아보자. 빈센트 반 고흐가 생애의 마지막 페이지를 막 넘길 즈음 ‘게 두 마리’란 작품을 세상에 선보였다.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위탁 보관된 희귀품이다. 한 마리는 똑바로 앉아있는데, 또 한 녀석은 여차하면 뒤로 넘어지려는 포즈라서 흥미롭다. 청록과 빨강과 노랑이 연출하는 채색의 대비가 두드러지고, 거칠고 두텁게 그은 필획의 흔적이 생생한 화가 특유의 기법(흔히 ‘임파스토’라고 부른다)이 뚜렷이 보인다.

반 고흐의 조형과 색채 실험이 잘 드러난 이 작품은 작가 사후에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여 암스테르담에 주재하던 영국 영사는 주머닛돈으로 이 그림을 샀다. 영사는 몇 년 뒤 다른 이에게 그림을 넘겼다. 얼마나 받았을까. 달랑 8파운드였다. 시간은 훌쩍 흘러 2004년, 런던 소더비에 이 작품에 올랐다. 낙찰가는 놀라지 마시라, 우리 돈으로 100억 원이 넘었다. 기록적인 경매가 소식을 들은 한국의 어느 애호가가 중얼거렸다. “마리 당 50억짜리 게로군.”

자, 이제부터 독자와 함께 구경해볼 곳은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시장이다. 기묘하고 이상해서 ‘기이’라고 했지만 더러는 어이가 없는 곳이기도 하다. 어불성설이라 손가락질 받기 딱 좋은 시장, 그게 어딘고 하니 바로 ‘미술 시장’이다.

한 줄기에 200프랑짜리 아스파라거스가 불쑥 좌판에 튀어나오는가 하면, 마리 당 50억 원을 상회하는 붉은 게도 어물전이 아닌 경매장에 머리를 들이민다. 어디 그뿐이랴. 이 시장에서는 작가의 똥도 통조림통에 넣어 팔아먹은 지 오래됐다. 돌려서 말하자면, 고등사기일수록 더욱 그럴듯하게 값이 매겨지는 시장이 미술 시장이다. 시니컬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이 바닥에 무지한 사림들에게 미술 시장은 ‘몰염치의 부티크’와 다름없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미술 시장은 경제원칙이란 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판매자도 있지만, 대체로 비용과 효과가 기대치를 어그러뜨리기 쉬운 거래 장터가 곧 미술품 시장이다. 희소할수록 가격이 대체로 높긴 하다. 하지만 그 희귀한 명품이 만인이 우러러보는 문화재가 되는 순간 일상적 거래의 가능성은 형편없이 떨어지게 마련인 것이 이 시장의 관행이다.

가격이 떨어진다고 해서 수요가 늘어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수요가 들끓어도 공급이 공산품처럼 척 척 대놓고 쏟아지는 일 역시 드물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데, 작품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말은 미술 시장에서 케케묵은 정설이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볼멘소리가 그래서 터져 나온다.

파블로 피카소가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가지고 조립한 조각 작품 ‘황소 머리(Tête de taureau)’. 파리 피카소 박물관 소장.
파블로 피카소가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가지고 조립한 조각 작품 ‘황소 머리(Tête de taureau)’. 파리 피카소 박물관 소장.

이번 회는 작품 이야기 하나만 더하고 끝내련다. 현대 미술에서 이 사람을 빼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20세기 미술의 골조(骨組), 파블로 피카소가 그 작가다. 1942년에 피카소는 ‘황소 머리’라는 제목의 조각 한 점을 내놓았다. 생긴 꼴이 정면에서 바라본 황소 대가리가 맞기는 하다.

놀랍고도 기막힌 건 이 조각을 만드는 데 사용한 재료다. 버려진 자전거에서 뜯어냈을 법한 낡은 안장과 핸들을 가지고 뚝딱 꿰맞춘 것이 저 유명한 ‘황소 머리’다.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에 지금 버젓이 들어앉은 이 명품은 기법으로 치면 ‘아상블라주(assemblage)’에 해당한다. 폐기된 물품이나 잡다한 일상용품 등을 끌어모으는 제작 기술이 아상블라주다. 요새 눈으로야 신기하달 수 없는 기법이지만, 그때만 해도 이른바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안장이나 핸들은 피카소가 제 손으로 만든 게 아니다. 보는 이는 모두가 기성 자전거 부품인 줄 안다. 황소 머리처럼 보이도록 장치한 피카소의 공력은 그럼 무엇일까. 진지함과 유머러스함을 동시에 구현한 아이디어가 이 작품의 알짬이자 골갱이다.

우리가 여태껏 믿어온 미술품의 참가치는 무엇인가. 만드는 데 들어간 ‘기술’과 ‘정성’ 아니었던가. 다 빈치가 그렇고 미켈란젤로가 그랬다. 20세기 이전까지 예술은 그것을 화두로 삼아 행세하고 살았다. 피카소는 기술과 정성 대신 무엇으로 예술을 조미(調味)하고 있는가. 넘치는 활력과 굳건한 자신감, 그리고 왕성한 실험과 샘솟는 창조 등이다. 그것이 피카소의 천재성을 이룩한 자원이다. 이러한 자원은 원가를 계산하기 어렵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전통의 경제 원리를 뒤흔드는 골치 아픈 요인들이 오늘의 현대미술과 미술 시장에서 정령(精靈)처럼 어슬렁거린다.

예술의 정의와 미술의 본질은 한 손에 움켜쥘 수 없다. 누군가 멋들어지게 말했다. “아름다운 거짓으로 명료한 진실을 만드는 것.” 허구에 값을 매기는, 부질없어도 긍정해야 하는 행위, 그게 바로 ‘아트노믹스’의 본령일 테다. 말이 난 김에 명토를 박고자 한다. 반 고흐의 게 중에 어느 것이 더 비쌀까. 당연히 넘어지는 게다. 게살이 통통해서가 결코 아니다. 이 값어치에 어두운 애호가는 미술은커녕 인정도, 물정도, 사정도 모르는 이가 틀림없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신문사에서 미술 담당 기자로 오랫동안 국내외 미술 현장을 취재했다. 국민일보 문화부장과 동아닷컴 취재본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우리문화사랑 운영위원이자 '학고재' 고문,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다, 그림이다' ‘사람 보는 눈’ 등 다수가 있다.

저작권자 © 여성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