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협-피터슨연구소 공동 세미나
자본흐름의 속도-방향 동시 전환
중앙은행 정책 울타리서 벗어나
유동성은 다극 체제보다 힘 선호

인공지능(AI)은 금융의 형식을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중앙은행의 기준금리와 달러의 움직임이 자본의 흐름을 결정했다면, 이제는 데이터·언어·연산이 새로운 통화 경로를 만든다. 사람의 언어로 이뤄진 거래가 코딩된 계약으로 바뀌는 순간, 통화는 국가 간 벽을 잃는다.
27일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는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공동으로 ‘세계 경제질서 재편: 무역·AI·금융 회복력의 해법’을 주제로 국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번 세미나는 ‘달러 패권’이나 ‘통화 다극화’와 같은 이분법보다는 기술과 무역을 통해 통화 이동성이 어떻게 재정의되는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공급망 재편과 기술 의존도가 동시에 높아지는 세계 경제 속에서, 한국이 새로운 ‘결제 중심국(settlement hub)’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언급됐다. 특히 AI 기반 무역 결제 시스템이 국가 간 금융 네트워크를 자동으로 조정하며, 외환시장 개방 정책과 맞물려 자유로운 통화 이동의 실험장으로서 한국의 위치를 부각시켰다.
두 번째 세션에서는 AI가 무역과 금융 회복력(resilience)을 어떻게 강화할 수 있는지가 핵심 주제로 다뤄졌다. AI는 단순한 자동화 도구가 아니라, 위험 예측과 정책 시뮬레이션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제 행위자(agent)로 정의됐다. 이는 곧 ‘AI가 움직이는 통화’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개념적 전환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논의의 초점을 ‘달러 패권 약화’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AI 기술이 각국 금융 시스템의 상호 운용성을 높이면서, 통화 간 경계선을 흐리게 만드는 기술적 자유화(technological liberalization) 흐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평가다.
인공지능이 통화 이동을 촉진할수록 약한 통화에 대한 기피도 함께 커질 것으로 보인다. AI 알고리즘이 국가별 인플레이션, 금리, 외환 보유액, 거시정책 신뢰도 등을 실시간 분석하면서 자금은 원화보다 더 안정적이고 강한 통화로 쏠린다. ‘데이터에 기반한 회피(data-driven avoidance)’가 가능해지면서 통화 간 경쟁력은 정책보다 정보 접근성과 신뢰 지표에 의해 결정되는 양상으로 바뀔 전망이다.
OECD 패널로 참석한 글로벌 거시경제학자들은 “AI의 중추 기능은 경제 주체 간 신뢰의 자동화”라고 요약했다. 한경협 관계자는 “AI는 자본 이동의 속도를 높이는 동시에, 거래의 의미를 재구성한다”고 말했다. 금융기관·무역기업·정부가 신뢰 기반으로 교환하던 신호들이 이제 AI 모델의 확률 신뢰도(probabilistic trust)로 대체되는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