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지 의약품 불법 거래 2641건
법 공백에 '미프지미소' 품목 허가 보류
법률 자문 6건 중 4건 "법 개정 불필요"
복지위 "허가 미루는 것 재량권 남용"
전문가 "국회 입법 부작위 근본 원인"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지 6년이 지났지만 임신 중지 의약품은 여전히 국내에서 허가되지 않고 있다. 올해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소극적 행정이 도마 위에 올랐지만 근본적으로는 입법 공백부터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9년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해 “여성의 신체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21년부터 낙태죄는 비범죄화됐다. 하지만 임신중지약의 공식 도입은 여전히 멈춰 있다. 그 사이 여성들은 불법으로 유통되는 약물에 의존하며 예측할 수 없는 부작용 위험에 노출됐다.
22일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식약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낙태죄 효력이 상실된 2021년 이후 임신 중지 의약품 불법판매 적발 건수는 2641건에 달했다. 지난해에만 741건, 올해 9월 기준 352건이 적발됐다. 중국산 가짜 ‘미프진’ 5만7000정이 정품으로 둔갑해 약 23억원어치가 판매된 사례도 있었다. 항암주사제 ‘메토트렉세이트’가 임신 중지용으로 오남용돼 부작용 보고가 864건에 이르렀다.
이 같은 불법 유통의 배경에는 정부의 소극적 행정이 자리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식약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임신중지약 ‘미프지미소’(미페프리스톤·미소프로스톨)의 품목 허가를 보류하고 있다. 현대약품은 2021년 이후 네 차례 허가를 신청했지만 유통이 허용되지 않았다. 식약처는 “법률상 근거가 마련되면 신속히 심사를 속개하겠다”고 지난달 밝혔지만 내부 법률 자문 6건 중 4건은 ‘법 개정 없이도 품목 허가가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전날 복지위 국정감사에서는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남 의원은 “식약처가 법 개정 여부와 무관하게 인공임신중절 의약품의 품목 허가가 가능하다는 법률 자문을 받았다”며 “품목 허가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위법이라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전진숙 민주당 의원도 “세계보건기구(WHO)가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했는데 식약처가 유독 임신 중지 의약품에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임신 중지 의약품 알선 광고가 꾸준히 성행했다”고 했다.

박주민 보건복지위원장은 “식약처가 받은 법률 자문 중 4건에 법 개정 없이도 가능하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며 “법률 개정 등 제도 전반을 검토할 TF팀이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 논의가 신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오유경 식약처장은 “가능성과 문제점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보고받았다”며 “국정과제로 지정된 만큼 관계 부처와 함께 제도적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복지위에서는 식약처의 소극적 행정을 질타했지만 법적 근거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행정부의 적극 행정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결국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6년째 모자보건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은 입법 공백이 이번 논란의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는 여성경제신문과 통화에서 “임신 중지 의약품 허가 관련 식약처의 소극적 태도는 결국 모자보건법 개정 지연 문제와 맞물려 있다. 국회의 입법 부작위에 대한 비판이 먼저 필요하다”며 “국회가 가임기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볼모로 잡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성평등가족부 역시 모자보건법 개정 논의에서 손을 놓고 있는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임신 중지는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이 충돌하는 고도의 가치문제로 법적 근거 없이 식약처가 품목 허가를 내리는 것은 매우 적극적인 행정행위에 해당한다”며 “법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나서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했다.
이어 “식약처가 법률 자문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를 재량권 남용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임신 중지 의약품이 처방 없이 유통될 경우 여성 건강 훼손 우려 등 복합적 요인이 있는 만큼 관련 법이 명확히 정리된 이후 논의가 진행되는 것이 정상적인 수순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세계보건기구(WHO)는 2005년 임신중지약 ‘미프진(Mifegyne)’을 핵심 필수의약품 목록에 등재했고 현재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95개국에서 공식 허가를 받아 사용 중이다. 남인순 의원은 지난 7월 수술뿐 아니라 약물 임신 중지를 허용하고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포함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22대 국회에서 처음 대표 발의했다.
여성경제신문 김정수 기자 essence@seoul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