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지속된 임신 중지 입법 공백
의료 체계‧가이드라인 구축 절실해

지난해 4월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모두의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주최로 낙태죄 폐지 2주년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4월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모두의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주최로 낙태죄 폐지 2주년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른바 '36주 낙태 브이로그(일상 영상)'로 후기 임신 중지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가운데 여성이 임신 후기에 임신 중지를 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에 초점을 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임신 후기에 임신 중단이 이뤄진 사건이 이슈되면서 해당 여성과 수술을 집행한 의사에 대해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다만 여성‧시민단체에선 이러한 사건들을 처벌 중심 관점에서 접근해선 안 되며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후기 임신 중지로 내몰리는 요인을 살펴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지난 2019년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후속 입법을 권고했다. 하지만 국회는 아직 대체 입법을 내놓지 않고 공백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정부 역시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공식적인 의료 체계에서 안전한 임신 중지를 보장하는 법·제도를 구축하지 않고 있다.

지난 13일 29개 단체가 모인 '모두의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안전한 임신 중지 네트워크)는 공동 성명서를 통해 "지금 우리 사회가 더욱 중요하게 질문해야 할 것은 살인죄의 성립 여부가 아니라 왜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이전과 다름없이 이처럼 늦은 시기에 임신 중지가 진행됐는지, 임신 36주 차가 돼서야 임신 중지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이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3일 여성·인권단체들은 '36주 낙태 영상'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모든 책임은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체계 구축을 방기한 보건복지부에 있다"고 비판했다. /연합뉴스
지난 13일 여성·인권단체들은 '36주 낙태 영상'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모든 책임은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체계 구축을 방기한 보건복지부에 있다"고 비판했다. /연합뉴스

단체는 "보건의료 접근성이 낮고 사회경제적 여건이 취약한 경우에는 초기에 임신 중지를 하지 못하고 시기만 지연되는 상황을 더 많이 겪게 된다"며 "의료기관의 거부, 과도한 비용 청구, 제3자의 개입, 폭력적 상황 등 다양한 요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고 강조했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이번 사건은 임신 중지와 관련한 의료 서비스와 정보 접근성을 향상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의료계는 임신 중지 결정이 늦어지는 이유 중 하나로 사회경제적 자원의 부족으로 임신 사실을 인지하거나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꼽았다.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뒤늦게 임신을 중지하는 이들 중에는 사회경제적 자원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며 "소아 성폭력 피해자들 태반이 임신 2분기가 넘어서 내원한다. 지적 장애를 가져 임신 징후를 발견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으며 임신 중지를 진작 결정했지만 관련 정보가 부족하고 수술 비용이 없어서 시행까지 늦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임신 중지가 보편적 의료서비스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임신 중지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걸 논의할 때라는 입장이다. 윤 전문의는 뉴시스에 "후기 임신 중지는 그동안에도 계속 있어 왔고 임신 중지를 다른 의료 서비스처럼 제도화하지 않으면 음지에서 앞으로도 계속 있을 수밖에 없다"며 "임신 중지가 안전한 방법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건강보험 적용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유랑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임신 중지에 건강보험이 적용된다면 이와 관련된 데이터가 남게 돼 정확한 실태 파악이 가능해진다"며 "임신 당사자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을 최우선으로 보장하는 보건의료 환경이 구축되도록 건강보험 적용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여성계에서도 복지부가 하루빨리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의료체계와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는 한국일보에 "낙태죄 비범죄화 이후 관련 법률 개정안을 마련해야 하는 국회와 보건복지부의 역할은 구분돼야 한다"며 "복지부는 임신 중지가 필요한 여성들이 정확한 의료 정보를 기반으로 빠른 시기에 병원을 찾아가고 건강보험도 적용받을 수 있는 방안과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이번 (낙태 브이로그) 사건처럼 임신 후기까지 임신 중지를 하지 못하는 사례를 방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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