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내년 공공신탁 시범사업 첫 가동
“통장 못 맡긴다” 노인 반발에 제도 안착 난망

국내 치매 환자 자산은 154조원에 달한다. 2050년엔 488조원으로 늘 전망이다. 정부는 사기·갈취 피해를 막기 위해 내년 ‘치매안심재산관리(공공신탁)’ 시범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노인의 통장 불신, 가족 반발, 전문 인력 부족 등 난관이 크다. 전문가들은 돌봄과 연계한 신탁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국내 치매 환자 자산은 154조원에 달한다. 2050년엔 488조원으로 늘 전망이다. 정부는 사기·갈취 피해를 막기 위해 내년 ‘치매안심재산관리(공공신탁)’ 시범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노인의 통장 불신, 가족 반발, 전문 인력 부족 등 난관이 크다. 전문가들은 돌봄과 연계한 신탁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50년대 생 우리 아버지는 평생을 본인 돈을 남에게 맡긴 적이 없어요. 치매에 걸리시고 집에서 단 돈 1만원이 없어져도 자식을 의심하곤 해요. 본인 돈을 직접 관리하는 데 익숙해진 아버지 세대가 과연 공공신탁제도를 신뢰할까요.

내년부터 시범사업으로 도입할 ‘치매안심재산관리(공공신탁)’ 제도가 현 정부 첫 공식 치매 정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16일 국무회의에서 확정한 123개 국정과제 가운데 ‘인구 가족 구조 변화 대응 및 은퇴 세대 맞춤형 지원’의 핵심 사업으로 공공신탁을 포함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다가올 국정감사에서 보건복지위원회가 반드시 점검해야 할 현안으로 치매 환자 자산 보호를 꼽았다.

23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정부가 공공신탁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치매 환자의 재산을 둘러싼 사회적 위험이 자리한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2023년 기준 국내 65세 이상 치매 상병자 약 124만명의 자산을 조사한 결과 총 154조원 규모의 ‘치매 머니’가 파악됐다고 밝혔다.

일명 치매 머니는 2050년 488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의 경우 2023년 특수사기 피해자 10명 중 8명이 65세 이상이었고 SNS 투자사기 피해자 절반이 60대 이상이었다. 다이와연구소는 일본 치매 노인의 금융자산이 2035년 221조 9000억 엔(약 2087조 원)까지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공신탁은 치매 환자가 직접 재산을 관리하기 어려울 경우 공공기관이 이를 대신 관리해 일상생활과 치료, 여가를 이어가도록 돕는 제도다. 하지만 제도 안착까지는 적잖은 난관이 예상된다. 현장에서는 치매 환자의 가족 반발, 고령층의 심리적 거부감, 전문 인력 부족 등을 현실적인 걸림돌로 지적한다.

국민연금연구원은 지난해 노인요양시설, 치매안심센터, 종합사회복지관 관계자 20명을 심층 인터뷰해 ‘고령자 공공신탁 사업모델’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치매 환자는 경제적 학대와 사기에 쉽게 노출돼 있었고 현장 종사자들은 공공신탁이 이런 피해를 막는 제도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 치매안심센터 사회복지사는 여성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정수기를 설치하지 않았는데 몇 대가 계약돼 있었다”며 노인 명의 도용 피해를 전했다. 다른 사회복지사는 “동네 식당 주인이 매달 20만원씩 식대를 갈취했다가 후견인 선임 뒤 경찰 신고로 멈췄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재가 요양보호사가 치매 노인의 가정 사정을 파악한 뒤 입양 절차를 거쳐 사실상 재산에 접근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가족의 부재와 돌봄 관계의 밀착이 동시에 위험 요인이 되고 있다. 독거노인의 경우 요양보호사와 생활지원사에게 재산을 맡겼다가 오히려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보고됐다. 치매 공공후견제도의 한계도 뚜렷하다.

시민 후견인의 전문성이 부족해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어렵고 응급실 상황에서는 서명을 거부하는 경우가 잦아 결국 담당자가 책임을 떠안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제도 도입의 가장 큰 벽은 환자 본인의 저항이다.

고령층은 평생 재산을 직접 관리해온 습관 때문에 “통장은 내가 관리해야 한다”는 태도를 쉽게 버리지 못한다. 일부 가족은 상속권을 이유로 반대하며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공공신탁이 초고령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고 강조한다. 특히 요양시설 입소 이후 치매가 악화된 환자는 재산 관리가 더욱 취약해지는데, 이 경우 공공신탁의 개입이 절실하다는 것.

보고서는 ‘돌봄 연계형 신탁’으로 설계할 것을 제안했다. 재산 관리와 함께 생활·돌봄 계획을 세워 존엄한 노후를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를 위해 △위탁자의 의사결정 능력 평가 기준 마련 △디지털 기반 투명한 관리 체계 △금융·법률 전문가와 사회복지사의 협력 △장기적 전담 인력 배치 등이 필수라고 제시했다.

김정은 숭실사이버대 요양복지학과 교수는 여성경제신문과 통화에서 "결국 제도의 성패는 신뢰 형성에 달려 있다. 본인의 의향을 존중하면서도 가족, 지역사회,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는 점에서다"라며 "공공신탁이 치매 환자의 재산을 지키는 안전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내년 시범사업이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라고 전했다. 

여성경제신문 김현우 기자 hyunoo9372@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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