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층 자산 대부분 예금·부동산
직접 운용 어려워 신탁제도 주목
美·日처럼 유연한 구조 필요 지적

고령층 자산운용 수요에 맞춘 신탁제도 개편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고령층 자산운용 수요에 맞춘 신탁제도 개편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고령층의 금융자산은 예금에 편중돼 있는 반면 미국과 일본은 신탁을 활용한 자산 운용 수단을 제도화해 고령자의 유동성과 수익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확장하고 있다. 고령층 자산이 생애 전반의 재정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 속에 각국의 신탁제도 구조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18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한국은 신탁업 진입 주체가 금융회사로 제한돼 있으며 수탁재산 범위와 상품 구조의 획일성도 뚜렷해 고령층 수요에 맞춘 유연한 신탁설계가 어려운 상황이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비금융 전문기관의 참여가 가능하고 노후자금·상속·요양 목적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신탁상품이 운용되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 황현영·노성호 연구위원의 보고서 ‘고령화 사회에서 자본시장의 역할 제고를 위한 제도 개선 방안’에 따르면 75세 이상 고령층 가구의 자산 중 부동산과 예금이 약 98%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금융자산의 대부분은 예금으로 구성돼 있으며 65세 이상 고령층의 금융투자자산의 보유 비중은 가계 총자산의 1%에 못 미치는 것으로 추정됐다. 특히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예금 편중은 심화되며 금융자산 내 직접투자 수단의 활용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고령층의 금융자산운용에 있어서 수익률을 제고하기 위하여 신탁업의 활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국내에서도 신탁업 라이선스의 유연화와 신탁재산 범위 확대를 통해 고령층 수요에 부합하는 다양한 상품이 설계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미국과 일본의 사례를 보면 금융업자뿐 아니라 비금융업자에게도 폭넓게 신탁업 진입을 허용해 다양한 상품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고령층 가입자가 상품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고 안전하게 가입할 수 있도록 신탁업 규율 전반에 걸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미국의 경우 신탁제도의 활용 범위가 광범위하며 금융회사 외에 법률·회계법인 등 비금융 주체의 신탁업 참여도 가능하다. 신탁재산에 대한 포괄적 규정을 두고 있어 계약에 따라 다양한 목적과 구조의 신탁설계가 가능하고 위탁자의 채권자가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철회가능신탁도 운용된다. 특히 고령자를 위한 자산관리 수단으로는 후견신탁, 양도형 연금신탁, 집합형 특별수요신탁 등이 활용되고 있으며 의사능력 상실 이후에도 사전 설계에 따라 수탁자가 자동으로 재산을 관리하는 구조가 일반화돼 있다.

이처럼 미국은 신탁업자에 대한 사전 규제는 적지만 행위 규제는 엄격하게 적용된다. 수탁자는 분산투자 원칙, 총수익 기준 등 투자자 이익 중심의 운용원칙을 따라야 한다. 또한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권유 활동은 다층적 보호 체계를 기반으로 통제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고령자의 자산이 단순 예금이 아닌 금융시장 기반 신탁 구조로 연결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형성한다.

일본은 신탁법과 신탁업법으로 이원화된 규제체계를 갖고 있으며 신탁재산의 범위를 포괄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유언대용신탁, 치매신탁, 원금보전형 가족신탁, 생명보험신탁 등 다양한 형태의 민사신탁이 제도권에서 운영되고 있다. 신탁계약대리점 제도를 통해 고령자 접근성을 높였으며 관리형 신탁회사의 경우 자본금 요건을 낮추고 전문기관 중심의 참여를 확대해 왔다.

고령층 자산운용과 관련해 일본은 후견 제도지원신탁이 대표적이며 금융기관이 수탁자가 되어 재산을 관리한다. 친족 후견인은 법원 승인 아래 출금·사용을 요청하는 구조다. 이외에도 치매신탁, 보이스피싱 방지를 위한 동의형 신탁 등 고령자의 인지 저하, 사기 노출 등에 대비한 신탁상품이 실제 운용되고 있다. 또한 일본 금융청과 협회는 75세 이상 고령자 대상 금융상품 권유 시 내부승인 절차, 설명 확인, 모니터링 규정 등을 구체화해 금융회사의 자율통제를 유도하고 있다.

신탁시장 규모에서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뚜렷하다. 작년 기준 한국의 신탁 수탁고는 1311조원으로 GDP 대비 약 57% 수준이며 주로 특정금전신탁과 부동산신탁 위주로 형성돼 있다. 반면 일본은 1580조 엔으로 GDP의 267%에 달한다.

한국의 경우 현재 고령층이 활용할 수 있는 신탁상품은 주로 특정금전신탁과 부동산신탁 등 상사신탁 구조에 한정돼 있다. 종합재산신탁은 전체 수탁고의 0.06%에 불과하며 자산을 포괄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은 사실상 부재한 상황이다. 자본시장법상 신탁업 진입이 금융기관에만 허용돼 있어 다양한 사회복지·법률 서비스와 연계한 설계는 불가능하고 신탁재산의 범위, 업무 위탁, 합동운용, 광고 등에도 다층적인 규제가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고령층의 자산을 생애 주기에 맞춰 운용할 수 있는 실질적 수단으로서 신탁의 역할은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고령화가 심화되는 시점에서 자산의 유동성과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 개선이 요구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고령 고객분들 중엔 예금 이자만으로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느끼시는 경우가 많아서, 매달 수익이 나오는 금전신탁에 관심을 보이시는 편”이라며 “그런데 요양이나 상속까지 염두에 두고 오시는 분들한텐 당장 추천할 수 있는 상품이 많지 않다 보니, 저희도 설명 드릴 때 한계가 있다”고 전했다.

고령층이 신탁을 자산운용 수단으로 활용하려면 은행 또는 신탁회사 PB 창구에서 상담을 받고 자산 규모와 목적, 가족 간 합의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산을 고정하지 않고 유동화해 활용하는 구조인 만큼 수익률보다 지속 가능한 현금 흐름 확보와 예기치 않은 상황에 대비한 설계가 핵심이다.

전문가들은 생애주기별 자산운용 수요에 맞춰 신탁제도의 유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황현영·노성호 연구위원은 “고령자의 신탁업 활용도 제고를 위해 치매신탁, 후견지원신탁 등 고령자보호가 필요한 신탁유형에는 원금보장형 신탁상품을 허용하고, 가족형 복지 신탁에 대한 합동 운용 허용, 원천 징수 주기 통일 및 광고 규제 완화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고령 금융소비자보호를 강화하는 제도 개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며 “신탁업자의 신인의무 준수를 위한 구체적인 원칙을 보완하고 고령자에 대한 설명의무, 신탁업자에 대한 감독을 강화해 불완전판매 관련 피해자 구제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여성경제신문 박소연 기자 syeon0213@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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