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
은퇴 후 무엇을 할 것인가
아침에 일어나면 어디로 가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
평생 학습을 위한 바람직한 모델
20세기 초 40세에 불과하던 기대 수명이 의학의 발달로 늘기 시작하더니 1970년대에는 70세를 넘어섰습니다. 수명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은퇴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 유럽에서 가장 먼저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프랑스에서는 은퇴한 사람을 재교육하여 후반생에서 그들이 다시 한번 비상할 수 있도록 지자체, 대학 등이 중심이 되어 은퇴자를 위한 제3기 인생학교 ‘U3A(University of the 3rd Age)’를 설립했습니다.
은퇴 후 가장의 역할과 육아의 부담에서 벗어난 어른들은 평소 관심을 가졌던 분야에 대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러한 재교육 움직임은 이태리, 스페인 등 인근 국가로 퍼져나갔습니다. 프랑스에서 출발한 U3A 운동은 1980년대 영국으로 건너가며 학교를 운영하는 주체가 지자체에서 시민으로 바뀌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시민 스스로가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을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으로 발전시키며 전국으로 보급되었습니다. 현재 영국에는 40만명이 넘는 회원이 1000여 개의 지역 U3A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퇴직한 후 지역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찾다가 우연히 영국 U3A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꼭 필요한 커뮤니티라고 생각했습니다. 2012년 보건복지부 주최 국민연금공단 주관으로 8만 시간(60세부터 80세까지 수면, 식사 등 필수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개인에게 온전히 주어진 자유시간)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란 주제로 에세이를 공모할 때 평소 저의 생각을 적어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란 제목으로 응모했습니다.
얼마 후 심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제가 응모한 에세이가 대상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나 의아했는데 수상 소식은 저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지인들은 영국에서나 가능하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르다고 만류했지만 2013년 3월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95㎡(29평) 공간을 빌려 영국의 U3A를 벤치마킹한 인생학교를 개교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거의 초유의 일인지 개교 얼마 후 KBS를 비롯하여 MBC, SBS, EBS 등 주요 언론매체에서 학교를 취재했습니다. 언론 보도를 보고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영락교회와 새문안교회에서는 직접 우리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노인대학은 있지만 5060세대를 위한 커뮤니티는 없다며 교회 내에 이런 학교를 운영하겠다고 합니다.

부천시, 강동구청과 같은 지자체에서도 견학을 왔습니다. 얼마 후 우리 학교를 모델로 강동구청에 강동 U3A가 개교했습니다. 해외에서도 문의가 왔습니다. 방콕에 있는 교포 한 사람은 그곳에 우리 교포가 400명이나 있다며 그들과 함께 인생학교를 운영하겠다고 하여 몇 가지 팁을 전해주었습니다. 워싱턴 DC의 교포에게도 연락이 왔습니다. 시카고에 사는 교포는 직접 내한했습니다.
개교 5년째 되는 2017년 AK그룹에서 운영하는 백화점 문화아카데미 총괄팀장이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알고 왔냐고 했더니 분당 서울대병원 계간지에 실린 우리 학교 소식을 보고 왔답니다. 그는 분당구 서현동에 있는 AK백화점 문화아카데미의 공간 일부를 우리 시민들의 평생학습을 위하여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그의 제안에 따라 2018년 학교를 AK백화점으로 이전했습니다. 교육 여건이 시민들이 스스로 운영할 때보다 훨씬 편리해졌습니다. 백화점에서는 사회공헌이라는 명분과 매출을 도모하는 이점이 있습니다. 민간과 기업이 협업하는 보기 드문 커뮤니티가 탄생한 겁니다.

2018년 보건복지부와 KBS 공동주관으로 개최한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공모에 응모하여 한국사회복지협의회장상을 수상했습니다. 2019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과장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내에서 인생학교를 운영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의 제안에 따라 국립중앙도서관 홈피에 강좌 안내와 회원모집 내용을 공고했습니다. 학습할 수 있는 공간도 새로 마련했습니다. 회원모집을 다 끝내고 2020년 3월 봄학기 개교만 기다릴 때입니다.
2020년 1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바이러스가 2월에 우리나라에 감염되기 시작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개교를 3개월 연기하여 여름학기에 시작하자고 제안합니다. 3개월이 지나면 한때 유행했던 사스나 메르스처럼 코로나바이러스가 물러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감염이 점점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다시 가을학기로 3개월 연기했습니다. 결국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강좌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2020년 4월 위례신도시에 성남시 수정구청 부지로 예정되었던 곳이 건축 계획이 취소되며 5년간 임시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건물을 신축하기보다 컨테이너 50여 개를 쌓아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성남시는 그 공간의 운영을 성남문화재단에 위탁했고 재단은 복합문화공간의 이름을 위례 스토리박스로 작명했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성남문화재단 직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스토리박스 내에 위례인생학교 설립을 권유했습니다. 대구 신천지교회에서 발생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전국으로 퍼져나갈 때입니다.
2020년 5월 컨테이너 위에 현수막을 하나 걸고 강좌 6개를 기획한 후 회원을 모집했습니다. 그러나 6월에 개교하려던 계획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정부의 통제로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2020년 8월에야 어렵게 강좌를 시작했습니다. 위례인생학교는 그 후에도 코로나바이러스로 휴강을 반복하다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신규로 가입한 회원이 520명에 이릅니다.

2023년 3월 경기도청 과장과 주무관이 학교를 견학하러 왔습니다. 5월에는 경기도의 초청으로 도청을 방문하여 경기도와 경기복지재단 직원들과 베이비부머세대를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토의했습니다. 2023년 9월 경기도에서는 구청사에 경기인생캠퍼스를 세우고 운영 주체를 공모했습니다. 위례인생학교에서 공모에 응하여 운영 주체로 선정되었습니다.
청주 서원대와 2023년 인생학교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맺은 바 있는데 최근 청주문화재단에서 공간을 제공하고 서원대에서 인적자원을 지원하며 청주시민이 운영 주체가 되는 청주인생학교 개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민간과 공공 그리고 학계 3자가 협업하는 커뮤니티가 곧 탄생합니다.
2024년 2월 진주 삼일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진주에도 인생학교를 설립하고자 한다며 조언을 부탁했습니다. 교회를 방문하니 주차장 공간이 넓고 강의할 수 있는 공간만 10여 개나 되었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 몇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예배당에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습니다.
교회에는 강좌를 이끌 전직 현직 대학교수 등 훌륭한 인적자원이 많이 있습니다. 공간도 충분합니다. 배우고자 하는 수요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우선 교인을 상대로 강좌를 시작하고 진주시민을 대상으로 점차 확대할 계획입니다.

얼마 전에는 의정부시 평생학습원에서 찾아왔습니다. 평생학습원 내에 5060세대를 위한 의정부인생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계획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완벽한 상태에서 출발하기보다 6월에 개교하는 것으로 목표를 세우고 시범강좌를 통해 미비점을 보완한 후 9월 가을학기를 운영하는 것이 더 앞서가는 길이라며 독려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경로당이 6만여 개가 넘습니다. 그러나 경로당에 다니던 노인들은 돌아가시고 새로이 경로당에 들어갈 나이가 되는 사람은 경로당에 가지 않습니다. 70대 시니어에게 경로당 얘기를 하면 펄쩍 뛰며 고개를 흔듭니다. 그래서 경로당이 자칫 공동화되기 쉽습니다.
지역에서 인생학교 설립을 원하는 수요는 많은데 공간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경로당에 인생학교 프로그램을 마련하면 경로당도 활성화되고 지역사회 시민들의 평생학습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모델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한편 아파트 단지 내에 인생학교 개교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2000세대 가까이 되는데 거주민이 7000~8000명으로 예상됩니다. 이 정도면 인생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규모가 됩니다. 현재 6월 개교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는데 이 학교가 성공하면 아파트 단지마다 인생학교가 들어설 수 있지 않을까 전망됩니다.
영국에서 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처럼 1000여 개는 아니더라도 100개 정도는 지역 곳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직장인들이 은퇴를 두려워하기보다 기다려지는 사회가 되기를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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