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배송 공동 현관 비밀번호 기재, 범죄 노출 우려

공통현관 비밀번호 입력기 위에 비밀번호가 버젓이 적혀있다. /제보자
공통현관 비밀번호 입력기 위에 비밀번호가 버젓이 적혀있다. /제보자

# 경기도 하남시에 거주하는 이미정 씨(가명·여·28)는 지난 9월 황당한 일을 겪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이씨는 공동현관문 비밀번호 입력창 아래에 붙어있는 작은 메모지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출입문 공동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관리사무실에서 CCTV를 확인해 보니 이씨가 1주일 전 주문한 식재료를 배달한 택배기사가 메모지에 적어 붙여둔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이씨는 장 보는 시간이 없어 주기적으로 새벽배송을 이용했다. 새벽배송 특성상 고객이 잠든 시간에 배송하다 보니 공동현관문 비밀번호를 미리 적어두어야 했는데, 택배 기사의 사정을 들어보니 다른 택배 기사의 업무 편의를 위해 비밀번호를 적어 두었다고 했다. 

이커머스 업계의 배송 속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한편에선 고객 개인정보 노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부 배달 기사가 아파트, 빌라 등 주택 시설 공동현관문 비밀번호를 노출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3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새벽배송과 퀵커머스 과정에서 공동현관 비밀번호가 손쉽게 공유되면서 시민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이커머스 기업이 소비자의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수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배달원의 경우 직접 자신의 차량을 이용해 택배하는 일반인들로, 범죄에 악용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A 이커머스 업체의 경우 온라인 주문을 할 때 배송 정보에 '공동현관문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를 입력하지 않으면 주문 자체가 불가능하다.

국내 한 이커머스 업체의 온라인 주문 관련 정보 입력 칸에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창이 있다. /이커머스 업체 사이트 갈무리
국내 한 이커머스 업체의 온라인 주문 관련 정보 입력 칸에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창이 있다. /이커머스 업체 사이트 갈무리

익명을 요구한 한 주거시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여성경제신문에 "외부인이 출입하려면 경비실을 먼저 방문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비밀번호가 이미 널리 노출돼 출입 통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편리성과 보안을 맞바꾼 꼴이다. 1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개별 가정의 안전도 담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겅찰청에 따르면 2016년 1만1631건이었던 전체 주거침입 범죄는 2020년 1만8210건으로 5년간 56.6% 증가했다. 최근 5년간 주거침입 발생 건수가 증가하는 것과는 반대로 주거침입자 검거율은 해마다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016년 75.7%였던 검거율은 2017년 75.3%, 2018년 75.1%, 2019년 72.3%, 2020년 72.6%로 나타났다. 

개별 가정마다 ‘도어록’ 등 잠금장치를 설치한다 해도 주변에 숨어 비밀번호를 누르는 모습을 훔쳐보거나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 5월 말 서울 강북의 한 주택가에서 한 20대 남성이 여성 혼자 있는 집에 무단으로 들어갔다가 3일 만에 검거됐다. 이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범행 일주일 전 계단에 숨어 여성이 비밀번호를 누르는 장면을 지켜봤다"고 진술했다.

지난 2월 부산 해운대구에서는 아파트 복도 천장에 화재감지기로 위장한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입주민들이 비밀번호를 누르는 모습을 촬영한 40대 남성 2명이 검거됐다. 지난 1월에도 해운대구에서 블랙박스형 몰카를 설치해 혼자 사는 여성의 자택 출입문 비밀번호를 알아낸 뒤 12차례에 걸쳐 몰래 집에 드나든 20대 남성이 적발됐다.

주거침입은 성범죄나 강력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크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주거침입 성범죄는 981건으로 집계됐다. 주거침입 강제추행이 483건(49.2%)으로 가장 많고, 주거침입 강간 335건(34.1%)이 뒤를 이었다.

실제 지난 8월 31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주택가에서는 30대 남성이 여성 혼자 자고 있는 집의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알아낸 뒤 여성이 귀가할 때 따라 들어가 성폭행을 시도했다. 여성이 깨어나자 폭행을 하고, 이를 말리러 온 이웃 주민들까지도 심하게 때려 결국 살인미수 등 혐의로 구속됐다.

택배기사나 음식 배달원은 비밀번호를 노출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법조계 관계자는 "현재 이를 처벌하는 법규가 없다. 외부인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 최선의 대응책"이라며 "하지만 피해자가 민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배달업 종사자가 누구나 볼 수 있게 비번을 적어 놓아 절도 등의 범죄로 이어졌다면 업무상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에는 음식 배달원이나 택배기사 등에게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 개인정보 보안에 대한 심각성은 날로 커지고 있지만 주민, 택배기사 등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공동현관 비밀번호는 심각한 개인정보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며 "공동주택의 보안이 허술해지면 범죄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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