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의 뜻밖의 반 고흐]
고흐 식으로 재해석한 밀레 그림
감정을 색상에 담는 독특한 화풍
빈센트 반 고흐는 1889년 『아마(린넨)를 자르는 농민』을 그린다. 이 그림의 농민은 아마를 가루로 만들어 아마포를 만들기 위해 섬유를 분리하고 있다. 동양엔 모시(저마)가 15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한산 모시짜기’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다. 반면 서양엔 린넨(아마)이 있다. 반 고흐가 살던 19세기는 면화 다음으로 재배가 많았다. 현재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가 북서 유럽 농장 벨트를 이루며, 전 세계 공급량의 약 80%를 차지한다. 그러니 그림의 배경인 프랑스엔 린넨과 관련된 풍경이 많았다.
이 그림을 그린 1889년에 고흐는 많은 일을 겪는다.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한 4월에 동생 테오에게 "운명이 한 순간에 찢긴 것 같은 순간"이라고 편지에 썼다. 그 뒤 9월엔 "불행과 행복 모두 필요하며 쓸모가 있다"고 변화한 심경을 고백한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반 고흐의 이 그림은 장 프랑수아 밀레의 판화를 따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리며 열악한 병원에서 불행을 극복해 나간 것이다. 끝내 병원에서 인상주의 화가인 클로드 모네를 비롯해 평론가로부터 최고라는 찬사를 받기에 이른다. 반 고흐의 그림은 밀레의 그림과는 색채가 뚜렷이 다르다. 어떻게 반 고흐는 색채만으로 그의 그림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을까?
반 고흐는 테오에게 "밀레는 능가할 수 없는 화가로 색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면 놀랄 거야. 그리고 복사가 아니라 다른 색채 언어로 번역하는 거라 흥미롭다"고 편지한다. 농민의 수고를 존중하는 밀레의 노동은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감정을 색채에 표현하길 원했다. 반면 반 고흐 주변엔 감정을 절제하며 그리는 화가들이 있었다.
반 고흐는 "색상과 모든 것을 수정하여 사진이 아닌 그림이 되는 길(편지,1888, 6.5)"을 걸어갔다. 사진이 아닌 ‘개인적인 인상(편지 1889.9.28)’으로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 반 고흐가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기까지 그 핵심은 색채와 붓질의 표현에 있었다.
반 고흐는 ‘색상을 계산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하며(편지 1890.1.13.)’라고 색채 연구를 한다. 색채 이론가 샤를 블랑의 보색(색상 대비를 이루는 한 쌍의 색상)대비 강조 효과 이론 등에 영향을 받는다. 그 결과 ‘색채는 그 자체로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반 고흐의 『아마를 자르는 농민』의 배경은 푸르고 바닥의 아마는 더욱 노랗게 보색 대비되고 있다. 반 고흐는 사진과 같은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고흐의 ‘개인적인 인상’을 담기 위해 보색 대비를 선택한다.
고흐는 또한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의 빠른 붓질에 찬사를 보냈다. 또한 "나는 일본인들의 작품에 있는 모든 것이 지닌 극도의 명료함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쉽게 몇 번의 자신 있는 붓질(스트로크)로 그림을 그린다. 아, 나는 몇 번의 스트로크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편지했다.
"밀레가 찾은 모든 것이 나에게 이보다 더 유용할 수는 없을 거야"라는 찬사를 보내며, 이를 통해 스스로 기쁨을 느꼈고 성취한다. 밀레는 불행의 순간에 큰 힘이 되어준 은인이었다. 이렇게 불행과 행복으로 만들어낸 색채 언어는 반 고흐를 탄생시켰다. 바로 반 고흐의 색채 언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