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치(廉恥)의 심리학

잭 라이언 코드네임 쉐도우 영화 포스터./김진국 문화평론가 제공
잭 라이언 코드네임 쉐도우 영화 포스터./김진국 문화평론가 제공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지 좀 된 영화 중 ‘잭 라이언 : 코드네임 쉐도우’이란 작품이 있다. 캐네스 브래너 감독의 2014년 작품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잭 라이언은 CIA 비밀 요원이다. 그는 뉴욕 월 스트리트에서 유능한 금융분석가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간다. 그의 직속 상관 하퍼역은 케빈 코스트너가 맡았다. 문제는 그의 약혼녀 캐시(키이라 나이틀리 분)조차 사랑하는 남자 잭의 신분을 아직 모른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전 세계 경제를 붕괴시키기 위한 경제 테러 음모가 진행 중인 걸 알게 된 잭. 그는 직접 러시아로 건너가 음모의 주동자로 보이는 빅터를 만난다. 빅터 역은 캐네스 브래너 감독이 겸한다. 드디어 잭과 빅터가 만났다.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물이다.

빅터가 잭에게 묻는다.
“러시아까지 무슨 일로 왔나요?”
잭은 대답한다.
“그냥 일상적인 감사(監査)를 위해서 온 거예요!”
빅터가 다시 따지듯이 묻는다.
“아니 뉴욕에서 앉아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뭐하러 여기까지 와요?”
라이언이 돌직구를 날린다.
"이 쪽에서 계좌를 숨겨놨잖아요!"
빅터가 되받아친다.
"미국인들은 직설적인 척하지만 그냥 무례한 거 아닙니까?"
잭도 가만있지 않는다.
"러시아인들은 시인인 척하지만 그냥 예민한 것 아닙니까?"

영화의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가 긴장된 상황인데도 위트가 있다. 실제 생활에서도 미국인들이나 러시아인들이 이런 유머가 있고 기지가 번득이는지는 나로서는 모르겠다.

어쨌건 두 사람의 대사가 오래 남아 내 머릿속을 맴돈다. 현대 우리 한국인들이 유머와 위트를 잊어버린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그렇게 느낀 걸까?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직설적인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무례하다. 시인인 척하지도 않는다. 마냥 예민할 뿐이다.

요즘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무례하게 내뱉고 본다. 반면에 자기가 듣기 싫은 말에는 극도로 예민하여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말을 한 사람을 고소, 고발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자신이 듣기 싫은 말을 해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들은 부모님의 말씀도 선생님의 말씀도 친척의 말도 직장 동료의 말도 제 맘에 들지 않으면, '듣기 불편하다!'며 걸고넘어진다.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굴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직설적인 척' 하거나 '시인인 척' 등 '~척하는' 경우는 그래도 기본적인 염치(廉恥)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는 경우다. 요즘은 '~척하는' 경우가 없다. 그냥 '언어의 설사병'에 걸린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은 생각도 없이 모조리 싸지른다.

귀는 틀어막아 대장이 꽉 막힌 만성 변비증 환자처럼 듣기 싫은 얘기는 한사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입은 설사병이요, 귀는 변비증이다. 예전에는 정치인이나 일부 갑질 인사들이나 그런 짓을 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염치’란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이렇다.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그럼 ‘체면’의 뜻은? '남을 대하는 도리, 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떳떳할 만한 입장이나 처지'다. 내친김에 ‘부끄러움’은?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 떳떳하지 못한 마음' 사전적인 의미는 이렇다.

내가 보기에 그 말이 그 말 같아서 종잡기가 어렵다. 내가 생각하는 염치는 이렇다. '내 편의 말이라도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 할 수 있는 용기, 남의 편의 말이라도 맞는 것은 맞다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이 염치 아닐까? 염치는 이런 용기와 담대함이 바탕이 돼야 한다.

연전에 D 여자대학교 강사는 강의 시간에 "돈 벌어서 딸한테 인형을 사주고 싶다!"는 말을 했다가 몇 명의 학생들이 듣기 불편하다고 항의하는 바람에 사과를 한 적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K 대학교 학생이 수업 시간에 토론하던 중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라는 "매우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진술"을 했다가 이를 듣기 싫어했던 몇몇 학생들이 거세게 사과를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호부호형(呼父呼兄), 그러니까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신세가 따로 없다. 일은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그 대학교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학생기자가 이를 비판하는 취지의 칼럼을 썼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자각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소위 전국의 '성소수자연대'와 '총학연대'가 벌떼처럼 일어나 '혐오 표현'을 한 기자의 사과와 징계, 사후 재발 방지 대책까지 요구하는 등 도를 넘는 공세를 했다. 대학신문도 언론일진대, 이 정도면 심각한 언론탄압이다. 나치 치하 게슈타포나 문혁 당시 홍위병들의 행태가 연상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 기가 찰 일은 편집국장을 비롯한 학생기자들은 '성소수자연대' 등의 기세에 놀라 거의 항복선언문에 가까운 사과문을 2차에 걸쳐 게재하는 등 그들의 요구를 거의 전부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라는 중립적인 문장도 소수자가 자기들 스스로 듣기 싫다고 판단하면 혐오 표현이 된다. 그들이 판사일 뿐만 아니라 검사, 변호사에 배심원 노릇까지 다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너희는 피고인이니 입 닥치고 있으란 분위기다. 학생들만 그런 게 아니다. 심지어 한 일간지 기자는 '젠더 아이덴티티' 문제는 토론의 영역이 아니라고 했단다. 아니 매우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비판적인 사고를 배우면서 학문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만끽해야 할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전체주의란 말인가.

'젠더 아이덴티티' 문제는 무슨 신성불가침의 영역인가? 토론의 영역이 아니라고? 그럼 '닥치고 믿고 받들기만 하라‘는 사이비 종교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를 함양해야 할 청소년들에게 이런 굴레를 씌우고 족쇄를 채우는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엉터리 트렌드에 짓눌린 기회주의자가 아니라면, 종교적 탈레반들이다.  남의 생각이 어떠한 지 그 사람의 입장에서 고려해 볼 생각은 전혀 없다. 오로지 제 잣대로만 타인을 재단하려 든다. 아! 이 지독한 '집단 난독증(難讀症)'과 심각한 '집단 난청병(難聽病)'을 어찌해야 하나?

‘코드네임 쉐도우’에서 미국의 잭과 러시아의 빅터가 나눈 대사는 이렇게 바뀌는 게 맞지 않을까.  "한국인은 돌직구에 무례하고, 시인도 아니면서 예민하다." 한국인들이여! 제발 직설적인 척이라도 좀 하자. 무례하지는 말고. 제발 시인인 척이라도 좀 하자. 예민해도 좋으니까 말이다.

내 편의 말, 내가 듣고 싶은 사람의 말만 추켜세우고, 남의 편의 말, 내가 듣기 싫은 말은 무례하게 깔아뭉개려는 몰염치(沒廉恥)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말처럼 좀 염치가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김진국 고려대 인문예술과정 주임교수

대학, 언론, 정부부처, 공기업 등에서 근무한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동서고금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융복합적 콘텐츠를 개발하고 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및 동 대학원을 비롯한 국내외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심리학자, 의학사, 의학석사, 대체의학박사(수료)다.

저작권자 © 여성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