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에서 커제 꺾고 우승한 신민준 스토리
7살때 양천대일바둑도장 입문···영재입단대회 통해 이세돌 내제자로

훗날 바둑 사가(史家)가 있다면 제25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결승 3번기 최종국을 한국바둑의 부활을 알리는 변곡점이었다고 기록할 것이다.
2021년 2월 4일 열렸던 LG배 결승 3번기 최종국에서 신민준 9단은 중국 커제 9단을 상대로 302수만에 백3집반승을 거두고 2-1,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왜 신민준의 승리가 한국바둑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알리는 변곡점이라고 하는 것일까.
이세돌 9단 이후 세계바둑을 평정한 이는 중국의 커제였다.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에서 커제를 이긴 한국 기사는 한 명도 없었고, 중국을 포함하더라도 커제를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에서 이긴 기사는 2016년 백령배에서 우승한 천야오예 9단 뿐이었다.
신민준은 이번 LG배 우승으로 커제를 세계대회 결승에서 꺾은 첫 한국의 바둑기사가 되었기에 그에게는 더 값진 승리이자 우승이 되었다.
또 최근 메이저 대회 한국과 중국의 결승에서 한국 기사가 중국 기사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건 2014년 삼성화재배에서 탕웨이싱을 물리치고 우승한 김지석 9단 이후 약 7년 만의 일이다.
바둑계 한 관계자는 "한국 바둑 전체가 기뻐하고 있다"면서 "한국 선수가 세계대회 결승전에서 중국 선수를 꺾은 것은 6년여 만이다. 우리가 그토록 기대하던 신진서-신민준 투톱의 기량이 드디어 만개한 것 같다. 앞으론 한국이 중국바둑을 다시 넘어설 것"이라고 바둑계 분위기를 전했다.
우승이 확정된 후 가진 인터뷰에서 신민준은 “커제는 꼭 한번 이겨보고 싶었던 상대였는데 마침 큰 무대에서 만나 꿈을 이뤘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는 소감을 남겼다.

여기까지는 바둑사적 의미가 담긴 이야기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신민준 개인과 주변의 얘기가 듣고 싶었다.
신민준의 아버지 신창석 씨(54)는 유명한 드라마 감독이라 바둑팬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어머니(최영매·45)는 마침 예전부터 제법 아는 사이. 그래서 부모의 눈을 통한 신민준의 LG배 우승 스토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요즘 민준이 기분이 좋아 보이긴 해요. 그렇다고 성적이 나빠 내색한 적은 없었는데 가만히 보면 커제를 이기고 난 뒤엔 집에서도 웃고 다니는 경우가 많고 밝아졌다는 느낌을 받아요. 부담을 덜어서 그럴까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밝았다. 요즘 신민준 9단의 근황이 궁금했다. “큰 승부를 앞두고 긴장을 많이 했을 텐데 중압감에서 좀 벗어난 것 같아요. 근데 민준이가 원래 기복이 심한 스타일인 거 아시잖아요(웃음). 세계대회에서 우승했으니까 성적이 계속 좋을 줄 알았는데 우승한 다음에는 계속 지더라고요. 바둑은 참 알 수가 없어요.”
신민준 9단의 아버지 신창석 PD는 한 인터뷰에서 우승을 차지한 아들에게 그냥 이 순간을 즐기라고 했다던데 정말 그게 다였을까 궁금했다.
“그건 대외용 멘트였고 실은 아빠가 펑펑 울었어요. 너무 감격스러워서. 저는 눈물은 보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울었고(웃음). 사실 세계대회 우승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국내대회 우승도 아직 없었고. 그래서 아직 때가 아니라고, 세계대회 정상은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결승에 올라가니까 또 기대가 되는 거에요. 다들 커제가 센 상대이니 어려울 거라고는 하는데 민준이가 처음에는 커제한테 두 번 연속 이기고 그랬거든요. 그 다음에 많이 져서 그렇지. 아무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 마음은 그게 아니잖아요. 다들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부담이 있었는데 민준이가 그걸 한방에 해소시켜 준 거니까 고마웠죠. 본인이 바둑을 원하긴 했어도 일곱 살부터 워낙 어려운 길로 보내 걱정이 컸는데 결과가 나온 거니까…. 그래서 아빠가 제일 좋아했어요.”
어디 가족만 좋아했을까. 신민준에게는 2명의 스승이 있는데 스승들의 반응도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민준이가 일곱 살 때 양천대일바둑도장에 입문했어요. 아빠가 인터넷으로 바둑 두는 걸 보더니 배우고 싶다고 했어요. 도장 들어갈 때는 10급쯤 됐나. 실력은 왕초보였는데 어리니까 가능성을 보고 원장님이 받아준 것 같아요. 프로 입단도 그곳에서 했으니 대단한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가르쳐주셨어요. 지금도 아들처럼 돌봐주세요.”
나중에 확인해보니 양천대일바둑도장 김희용 원장도 3국 내내 사흘 동안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하다가 민준이가 승리를 확정지은 순간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꼬맹이 시절부터 같이 고생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으리라. 더구나 신민준은 양천대일바둑도장이 배출한 첫 번째 세계대회 우승자. 첫 번째라는 큰 벽을 허물어준 제자는 의미가 있다.
또 한 명의 스승은 은퇴한 이세돌 9단으로 알고 있는데 이 9단도 축하를 해줬을까 궁금했다.
“네, 이세돌 사범님께도 당연히 연락을 드렸고 이 사범님께 식사 대접을 했어요. 꼭 하고 싶었는데 기꺼이 허락해주셨지요. 그 자리에서 이세돌 사범님이 민준이에게 ‘야, 넌 정말 아무 생각이 없구나’라고 말씀하셔서 다들 웃었어요. 이 사범님 말씀이 세계대회 결승전은 정말 떨려서 자신도 첫 결승전에선 이긴 줄 알고 떨다가 제풀에 지고 말았는데 민준이는 그런 큰 승부에서 완벽하게 마무리를 했대요. 그걸 보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신민준은 영재입단대회를 통해 입단한 후 이세돌 9단의 집에 내제자로 들어가 5개월 간 숙식을 함께 하며 바둑을 배운 바 있다. 후에 신민준은 “제가 영재입단대회를 통해 프로가 됐기 때문에 치열한 일반인 입단대회 출신 형들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많았는데 이세돌 9단에게 지도를 받으면서 바둑이 많이 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있었다. 향후 한국바둑을 최소 10년은 이끌어갈 것이라고 평가받는 신민준과 신진서는 그야말로 실과 바늘 같은 존재다. 신진서가 성적을 내면 신민준이 떠오르고, 신민준이 각광받으면 신진서가 궁금해진다.
신진서 때문에 신민준이 부담을 느끼지는 않을까. 어릴 때부터 둘을 지켜본 부모의 마음은 어떤지 궁금했다.
“어릴 적엔 신경을 쓰는 눈치더니 요즘은 괜찮은 것 같아요. 아마 괜찮으니까 민준이 성적도 좋은 게 아닐까요? 신진서 9단이 워낙 잘 두지만 민준이도 성적을 낼 때는 내니까 부모 입장에서 염려되는 점은 없습니다. 그저 아들이 좋아하는 바둑,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오래도록 즐겼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기사를 마무리하는 순간 때마침 신진서 9단이 농심신라면배에서 파죽의 5연승으로 한국에 우승컵을 안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팀에는 신민준 9단도 있었으니 둘이 합작으로 한국의 우승을 일군 셈. 한국바둑의 미래는 밝다.
유경춘 바둑평론가
대학졸업 후 첫 직장인 주간바둑신문 입사 이후 줄곧 바둑계에서 바둑전문기자로 활동해왔다. 월간 바둑세계 편집장, 넷마블바둑 컨텐츠팀장 등을 거쳐 현재는 (사)대한바둑협회 홍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