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뒤안길' 시리즈 세번째 이야기 '삼성의 위기 上'

지난해 5월 10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산업계 오랜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올 것이 왔는데, 너무 급작스럽게 온 것 같다. 진짜 위기가 왔다” 이에 덮친격으로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며 최고의 자리가 영원할 것 같았던 삼성전자는, 지난해 미국 애플의 ‘아이폰6’와 중국의 저가폰 ‘샤오미’ · ‘화웨이’에 밀려 고전하면서 영업이익이 32%나 급감했고, ‘위기설’은 현실이 됐다.
올해도 글로벌 경쟁이 치열하고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삼성맨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따지고 보면 사업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늘 위기의 연속이다. 그래서 시장 변화에 따른 신속한 대응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아가 혁신과 개발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창조 · 주도해간다면 더할 나위 없다.
이건희 회장의 공백 속에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31일 창립 45주년을 맞았다. 경기도 수원 삼성디지털시티 모바일연구소에서 열린 창립 기념행사에서 권오현 대표이사 부회장은 전날 발표한 3분기 영업이익이 작년보다 60% 급락한 상황을 잠시 묻어 두고 이날만큼은 임직원들을 격려했다.
권 부회장은 “45년 전 전자산업 불모지에서 후발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세계 톱 수준의 IT 기업이 됐다”며, “삼성 전자는 과거 수많은 난관을 항상 도약의 기회로 만들어 왔다”고 말했다. 덧붙여 “이는 디지털 시대와 모바일 시대 등 사업환경 변화에 발 빠르게 준비하고 변신해 왔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권 부회장은 “또 다른 변신이 요구되는 최근 경영환경에서는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를 거쳐 에코 시스템 중심으로 변화가 가속화하고 있다”며 “지속 성장을 위해 퍼스트무버(first-mover), 게임 체인저(game changer), 밸류 크리에이터(value creator)가 되자”고 당부했다. 따지고 보면 삼성의 역사는 늘 ‘위기’의 연속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발표한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라는 말은 신경영 선언을 대표하는 표현이 됐다. 취임 25주년 기념식에서 이 회장은 “취임 초 삼성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절감했다”고 회고했다. 이런 ‘위기의식’이 오늘의 삼성을 있게 한 초석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삼성에 불어닥친 ‘위기’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사업 외적 위기’와 ‘사업 내적 위기’가 그것이다. 사업 외적 위기는 정치권이나 정부 등과의 잘못된 관계가 발단이 되어 위기를 맞게 된 것을 이야기한다.
사업 내적 위기는 경영이 나 사업투자의 잘못으로 회사에 커다란 손실을 안김으로써 위기를 몰고 온 것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업외적 위기로는 ‘한비사건’을 꼽을 수 있다. ‘한비사건’은 1966년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현 삼성정밀화학)가 사카린을 밀수해 관세를 포탈하고 부당이득을 챙긴 사건이다. 이병철 회장은 이 사건 이후 경영일선에서 퇴진하고 둘째 아들 창희(전 새한미디어 회장 · 91년 사망) 씨(당시 상무)가 구속됐다.
큰아들 맹희 씨는 한비사건 이후 창희 씨가 아버지에 대한 ‘모반’을 저지르면서 아버지와의 갈등이 더욱 깊어지게 됐다고 그의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밝혔다. 당시 한비사건으로 6개월 형을 살고 나온 창희 씨는 ‘자신의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달러 밀반출 및 탈세 등 부정한 일을 저질렀으니 그를 기업에서 영원히 손을 떼게 해야 한다’는 탄원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다.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은 큰아들 맹희 씨가 이 일에 개입했다고 오해를 하게 됐고, 그것은 결국 삼성의 후계 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맹희 씨의 생각이다. 이병철 선 대회장은 한비사건에 대해 ‘호암자전’에서 ‘몇몇 정치인의 의도적인 작해공작(作害工作)’이라며 분개 했다.
다음은 호암자전 중 일부이다.
“사태는 심각했다. 한국제일의 재벌이 밀수를 했다고 신문들은 연일 대서특필했다. 국회에서도 연일 이 문제가 거론 되었다. 어느 신문은 반년 동안에 걸쳐 사설이나 기사를 통해서 계속 삼성을 비난하였다. 일단은 벌금으로 사건을 처리했던 검찰도, 이러한 여론에 눌렸음인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배 하면서까지 강제수사에 나서 창희를 비롯한 몇 사람의 삼성 사원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이 정치문제화 되고, 일부 매스컴이 이에 가담하여 끈질긴 삼성 공격을 되풀이했던 이면에는 당시의 복잡한 정계 사정이 얽혀 있었다. 지금 그 것을 여기에서 굳이 밝힐 생각은 없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자 하는 것은 OTSA(사카린 원료) 문제가 일사부재리의 원칙도 무시된 채 강제 수사를 받게 되었던 배경에는, 몇몇 정치인의 공작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현재로서는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으나 장차 그 진상이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당시 권력구조의 중추에 있던 인물이 OTSA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한국비료 주식의 30%증여’를 요구해 왔었던 사실도 있다”
1987년 이건희 회장의 취임 후 세 번의 사업외적 위기가 찾아온다.
‘정치는 4류’로 유명한 일명 ‘베이징 발언’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안기부 엑스파일’사건이다. 세번째는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가 그것이다.
이 회장은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로 인해 삼성은 YS정부로부터 상당기간 어려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 발언 이듬해인 1996년 이 회장은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다.
2005년 언론보도로 폭로된 이른바 ‘안기부 엑스파일’에는 1997년 연말 대선을 앞두고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만나, 돈을 건넬 특정 후보와 검찰 고위간부들의 이름, 금액 등을 논의하는 대화 내용이 담겨 있다.
검찰은 불법도청이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공익적 목적이라는 ‘내용’을 강조한 언론인들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이 사건으로 삼성이 정·관계 인사를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일로 이 회장은 2006년 2월, 8000억 원 사회헌납 등을 포함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세 번째 위기는 2007년 10월 30일 삼성그룹의 전 법무팀장 인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 사건이다. 김용철 변호사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50여억원의 비자금을 자신이 관리해왔다고 폭로했다. 또 이건희 회장의 직접 지시를 받아 검찰과 시민단체에 로비를 했다는 문건을 공개했다.
결과는 삼성의 해명대로 조세 포탈 혐의로만 기소했다. 삼성은 2008년 4월 이회장의 경영 퇴진 등 10개항 쇄신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2010년 이 회장은 경영 복귀를 선언한다.
그해 4월,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이건희 회장의 경영 복귀와 한국 정부의 재벌정책을 강도높게 비난하며 ‘어려운 재벌문제’ 라는 논평과 ‘군주의 귀환’이라는 분석기사를 통해 이 회장의 복귀 배경과 문제점 등을 분석했다. 논평의 핵심은 “한국이 잘나가고 있지만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재벌을 봐주는 것은 이제 중단해야 한다”는 내 용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