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고 힘 있으면 사면 받는 나라 더 이상 안 돼"여론 확산… 5월 석가탄신일, 8·15 광복절도 어려워

자금횡령 혐의로 징역 4년형을 받고 법정구속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불명예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800일 가까운 수감 기록으로 구속된 역대 재계 총수 가운데 최장기간 수감 기록을 매일 이어가고 있는 것. 대기업 회장 가운데 종전 최장기 수감은 2006년 4월 항소심에서 3년 선고를 받고 2007년 2월 대통령 특사로 사면될 때까지 약 10개월 실형을 살았던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이 가장 긴 기록이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올해 초 가석방 심사에 이어 3.1절 가석방 심사에서도 제외되면서 불명예 기록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특히 5월 석가탄신일, 8·15 광복절 가석방과 정기 가석방도 사실상 물 건너 갔다는 관측이 우세해 특사든 가석방이든 최 회장의 수감 기록은 1000일 가까이 이어질 것이란 분석이다. 최 회장의 만기 출소는 2017년 초로 예정돼 있다.
최태원 SK회장 수감 2년 넘어…"계열사의 실적 악화로 나타나"
이에 따라 SK는 수장 공백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그룹 안팎의 위기감도 높아지고 있다. 최 회장 공백 이후 수펙스추구협의회를 중심으로 비상경영체제를 구축하고 총력을 다하고 있지만 장기간의 오너 공백으로 시의적절한 투자와 신성장 사업 발굴이지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그룹을 이끌어 갈 구심점의 부재가 각 계열사의 실적 악화로 번지고 있다. 최근 사장단 인사에서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등 주력 계열사의 사장을 모두 갈아치운 것도 최근의 위기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액 65조8653억원을 기록했고, 영업이익은 적자로 돌아서 영업손실 2313억원을 냈다. SK텔레콤의 지난해 영업이익도 1조8251억원으로 전년 대비 9.2% 감소했다.
SK에너지도 7832억원의 영업손실을 냈고 SK인천석유화학도 3944억원의 손실을 봤다. 다만 SK하이닉스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5조1090억원으로 전년보다 51% 증가했다.
이 때문에 2012년 2월 최태원 회장이 SK하이닉스 인수를 주도하지 않았다면, 지난해 SK그룹은 주저앉았을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특히 그룹의 수익이 반도체 사업에서만 주로 나올 경우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반도체 업황이 침체되면 SK그룹의 수익성도 덩달아 악화되기 쉬운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자 SK그룹은 구속 수감 중인 최 회장의 가석방을 위해 그룹 차원에서 전사적으로 물밑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K가 현 정부의 창조경제 혁신센터가 있는 대전과 세종시 등에서 다른 기업들과 비교해 가장 열심히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최 회장의 가석방을 위한 분위기 조성이라는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게 업계의 시각이다.
SK는 지난 11월 청와대가 주도하는 지역창조경제 거점의 대기업 연계전략에 참여해 흡족한 반응을 얻어냈다. 이곳에 입주한 벤처기업 10개 중에 5곳이 국내외에서 13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는 희소식도 전했다.
최 회장은 또 지난해 받은 보수 187억원 전액을 사회적 기업 지원과 출소자 자활사업 등에 기부했다. 187억원은 최 회장이 2012년 성과급과 지난해 받은 보수 총액 중 이미 세금으로 납부된 액수를 제외한 실수령액이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불법 수익은 모두 환원하는 등 가석방 요건을 충족하고 일자리 창출과 경제 살리기에 공헌해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야 할 것"이라는 가석방 전제조건 중 하나를 짚은 셈이다.
특히 지난 11월엔 차녀 민정 씨가 '재벌가의 딸'로는 처음으로 해군에 지원, 현역 장교로 군 복무를 시작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재벌비리 악순환, 이래서야 끊을 수 있겠나…'가석방 신중론' 부상
하지만 SK그룹의 기대와는 달리, 최 회장의 가석방은 더욱 불투명해지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재벌에 대한 비우호적인 정치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데다, 국민정서도 살펴야 하는 난관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말 여권에서 기업인 사면 논의가 제기된 뒤 최 회장의 가석방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지만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사건으로 인해 가석방 얘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쏙 들어갔고 되레 대기업 오너가, 그리고 2~3세 경영진에 대한‘반재벌’ 정서가 확산되기까지 했다.
게다가 최 회장이 수감생활 중 1일 평균 3~4회에 걸쳐 면회를 한, 이른바 ‘황제면회’를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정적 여론을 형성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소속 정의당 서기호 의원에 따르면 최 회장은 2013년 2월 구속된 이후 2014년 7월까지 약 500일동안 특별면회와 변호인 면회를 합해 총 1778회의 면회를 했다고 밝혔다.
이는 하루평균 3.44회 면회를 해 온 것으로 법무부의 수용관리 업무지침에 따른 미결수용자 주2회, 기결수용자 주1회 특별면회 범위를 크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서 의원은 당시 "재벌들은 막강한 재력으로 다수의 변호인을 선임해 순차 대동한 채 하루에도 3~4차례씩 면회하고 있다"며 "법무부가 재벌들에게 황제면회를 시켜주기 위해서 특혜를 주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최근 최 회장의 배당이 286억원에서 330억원으로 15.4% 증가하며 작년과 마찬가지로 배당부자 3위 자리를 지킨 점도 법무부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공교롭게도 SK그룹은 일부 계열사의 평균 배당금이 1년 전보다 감소했지만, 최태원 회장이 최대주주(32.92%)인 SK C&C는 배당규모를 30% 넘게 늘렸다. 막강한 힘을 지닌 재벌 총수의 부적절한 처신을 보여주는 사례의 최신판이라는 시각이다.
무엇보다 현 정부 들어 기업인에 대한 특사는 한 번도 실시되지 않았다는 점과 그간 실질적으로 형기의 70~80% 이상을 채운 수형자들이 가석방돼 왔다는 점에서 SK그룹과 최 회장에 대한 특혜 시비로까지 번져 나가는 모양새다. 정의당 서기호 의원이 법무부에서 받은 가석방자의 형 집행률 현황 자료를 보면, 2007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형기의 50% 미만을 채운 상태로 가석방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가석방된 이들의 99% 이상은 형기의 70% 이상을 채웠다. 최태원 회장은 2013년 2월 징역 4년 형이 확정돼 수감 생활을 하고 있어 약 250일을 더 지내야 형기의 70% 이상을 채우게 된다. 형식적으로는 심사요건인 형기의 3분의 1을 마쳤지만 관행상 올해 말에야 가석방 가능성이 논의 될 수 있는 상황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지난 1월 신년기자회견에서 "가석방은 80% 형기를 채워야 한다는 법무부의 준칙이 있다”며 “이것을 깨고 하기는 현재로서는 어려운 얘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법무부의 준칙대로 형기의 80% 이상을 채우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최 회장의 가석방 시기는 더욱 늦춰지게 된다.
가석방 대상자는 법무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4∼8명의 위원이 참여하는 가석방 심사위원회에서 정한다. 법무부가 1년에 11차례 정도 교도소장의 신청에 따라 심사 대상자를 적격, 부적격 등으로 분류해 명단을 올리면 위원회에서 나이, 범죄동기, 건강 등을 고려해 가석방 여부를 심사한다. 위원회는 심사 결과를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하고, 최종 결정은 장관이 내린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 기업인 등에 대한 특혜성 사면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따라서 증세 논란 등 각종 공약 파기 논쟁이 가열되는 최근, 박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인 특별사면권 제한을 뒤집는 모양새가 연출되는 상황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기류도 감지된다.
지난 9월 황 장관이 기업인 사면설을 제기했을 때도 새정치민주연합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합법화하려는 망발"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朴정부, 최 회장 가석방 문제 국민정서 감안할 듯
결과적으로 정치권의 섣부른 '재벌 봐주기'가 역효과를 조장한 셈이다. 이에 따라 여권 내부에선 가석방 시기를 아예 연말로 늦추자는 주장도 없지 않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사면은 법원이 선고한 형의 효력 자체를 무효화하는 행위인 만큼 대통령이 정치적 부담을 지게 된다”면서, “아무리 경제살리기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하더라도 사면이나 가석방 카드를 쉽게 꺼내들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많다”고 밝혔다.
한편 최 회장은 성경을 열심히 읽는 등 신앙생활을 하며 지내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수감생활이 길어지면서 최근에 허리통증과 시력 약화를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K의 한 관계자는 "긴 수감생활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으며 옥중편지를 통해 직원들의 안부와 건강을 챙기는 등 성실하게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며 "사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 회장의 가석방이 이뤄지면 SK그룹의 투자의욕 고취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