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풍 휴양도시 삔우린 외국인들이 가장 살고싶은 도시로 꼽혀
한국음식 푸드카 운영 미미와 산타조···주고객은 미얀마 주민들

삔우린의 아침입니다. 이 마을은 미얀마에 사는 외국인들이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꼽힙니다. 중국 국경과 가까운 영국풍 휴양도시입니다. 옛 영국 식민시절 영국총독이 살았고, 영국인들이 쓰던 호텔들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해발 1100미터, 연중 평균온도가 15도~25℃를 유지해 선선합니다. 그래서 꽃과 커피의 도시, 빤묘도라고도 불립니다. 빤은 미얀마어로 꽃입니다. 주황빛 장미, 보랏빛 쟈카란다, 라벤다, 진홍빛 세인빤 등이 사시사철 피고 집니다. 제가 사는 이곳에 프리지아 카페(Freesia Cafe)가 있습니다.



카페 앞에 푸드카가 있고, 두 소녀가 하루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미와 산타조. 두 소녀의 이름입니다. 각각 양곤과 만달레이에서 왔습니다. 미미가 사수이고 산타조가 조수입니다. 한국산 푸드카에선 떡볶이, 오뎅, 김밥, 핫도그를 팔고, 카페 안에선 삔우린산 드립커피, 하와이언 과일피자, 빵, 한국라면, 삼겹살, 김치찌개, 비빔밥 등을 팝니다. 여긴 한국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주고객은 미얀마 주민들입니다. 이렇게 한국계 카페를 우리가 만들기까지 근 1년이 걸렸습니다. 사연도 많습니다. 우리 모두 한국음식을 만들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긴 관광지라 일본계 카페, 중국계 카페가 여럿 있습니다. 미얀마 사람들도 한국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가끔 한국여행객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김치도 담아야 하고, 분식을 하려면 김과 단무지도 사야하고, 고추장, 된장도 필요합니다. 없는 게 많아 재료와의 전쟁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음식 만드는 솜씨입니다.
인터넷 레시피를 아무리 따라 해도 그 맛이 나오질 않습니다. 소금, 고춧가루, 양념 등 미얀마산 기본재료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한국인에게 배우는 것입니다. 가끔 여기 오는 여행객 중 한국주부들에게 부탁해 부엌에서 씨름을 했습니다. 30여 가지 한국음식을 직원 미미에게 여러 분이 가르쳐주었습니다. 사람마다 조리법이 다르고 맛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요리용어에는 여기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습니다. 으깨다. 어슷썰다. 송송썰다. 저미다. 물을 자작하게 부어라 등등. 감자는 으깬다. 작은 조각으로 얇게 베어내는 건 저미다. 물을 적지도 많지도 않게 붓는 건 자작하게 등. 게다가 국, 찌개, 탕은 개념을 알아야 하므로 저도 공부해서 가르쳐줍니다. 이렇게 1년을 한국음식과 씨름했습니다.
사수 미미는 다행히 음식 만드는 일을 좋아하고, 혼자서 그 많은 일을 하고 음식을 공부했습니다. 미미는 저희와 3년을 같이 일하며 뒤늦게나마 고등학교까지 마쳤습니다. 중학교 시절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고아가 된 소녀입니다. 그러나 성격은 구김살 없이 아주 밝습니다.




이런 미미에게 어느 날 조수 한 명이 들어왔습니다. 열아홉 살의 산타조입니다. 이제 성년이 되었습니다. 사수는 조수에게 시장보기, 식탁 차리는 법, 떡볶이 만드는 법, 드립커피 만드는 법을 가르칩니다. 산타조는 매일 언니를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산타조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집안일을 해오던 소녀입니다.
산타조는 고향이 잉와입니다. 대도시 만달레이에서 한 시간 걸리지요. 그 옛날엔 버마 통일 왕조가 있던 곳이어서 왕궁도 있었습니다. 불교정신이 강하게 묻어나는 마을입니다. 미국인 최초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이 붙잡혀 와 갇힌 감옥도 있습니다. 이곳에 한 미얀마인 선교사가 여러 번 쫒겨나다 결국 가정교회를 세웠습니다. 3년 전 산타조는 이 교회에 다녔습니다. 가족 중 유일하게. 그러니 가족 간 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 산타조가 눈물을 흘리며 선교사를 찾아왔습니다. 손에는 성경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부탁합니다. "제가 당분간은 교회를 못 나올 거예요. 그리고 이 성경책을 좀 맡아주세요."

그간 소녀는 교회를 나오면서 가족들과 심각한 전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가족들 반대에도 계속 나가자, 어느 날 가족 중 한 사람이 성경책을 태워버리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산타조는 그 책을 소중히 여겼기에 이곳저곳 숨겨오다 이기지 못해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산타조는 다시 교회를 나왔습니다.


이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일과 동네일을 하며 자랐습니다. 먼 마을의 식당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소녀가 일하는 곳에 가끔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가족 간에 신앙이 다르면 얼마나 힘들까요. 그러다 성년이 되며 가족들을 설득해 이곳 카페로 오게 되었습니다.

산타조는 요즘 낮엔 일하고 밤이면 스스로 영어와 한국어를 공부합니다. 공부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같이 찾아갔습니다. 이 나라는 시기를 놓치면 공부하기 어렵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시작해야 한다니 교장선생님도 힘들다고 합니다. 중고 검정고시도 없고. 그러다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부속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봉사단체가 운영하는 초중고 교육과정입니다. 이제 코로나가 가라앉고 수업이 재개되면 산타조는 꿈에도 그리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삔우린의 저녁입니다. 카페가 문을 닫고 창문 너머 두 청년이 마주 앉아 있습니다. 미미는 한국의 제빵기능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산타조는 초등학교 교재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10년을 더 다녀야 고등학교를 마칩니다. 앞이 캄캄합니다. 그러나 이 두 소녀의 인생, 그 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선교
저널리스트 겸 작가. 국제 엔지오로 파견되어 미얀마에서 6년째 거주 중. 미얀마 대학에서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미얀마 전역을 다니며 사람, 환경, 자연을 만나는 일을 즐겨 한다. 국경을 맞댄 중국, 인도, 태국 등에 사는 난민들과 도시 빈민아동들의 교육에 큰 관심이 있다. 미얀마 국민은 노래를 좋아해 요즘 이 나라 인물을 다룬 뮤지컬 대본을 쓰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