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포렌식 압수수색 법원에 막히고 '2차 피해'만 속도
"수사 역사상 이런 경우는 처음"...피해자 측도 한계 인정
인권위 직권조사 착수했지만 박 전 시장 측 반격도 변수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둘러싼 수사가 한 달이 넘게 이어졌지만, 경찰은 '진상규명'의 단서를 좀처럼 찾지 못하며 한계를 보이는 양상이다.
박 전 시장 사망으로 핵심인 성추행 의혹 자체에 대한 수사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방조 의혹에 대해서도 핵심 참고인들이 부인하고 나서면서 난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경찰 내부에서도 박 전 시장 사건 수사를 놓고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선 수사가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경찰 수사 ‘네 갈래’…이 중 속도는 ‘2차 피해’ 수사뿐

20일 경찰에 따르면 박 전 시장과 관련한 수사는 크게 네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첫 번째는 핵심 사안인 성추행 의혹이다. 두 번째는 박 전 시장 변사, 세 번째는 성추행 방조, 네 번째는 성추행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 수사다.
일단 가장 근간이 되는 성추행 의혹 수사는 '공소권 없음'으로 사실상 더 진행하기 어려운 상태다. 검찰사건사무규칙에 따라 수사 받던 피의자가 사망하면 검사는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불기소 처분하게 돼 있다.
변사 사건 수사의 경우 초반 속도감 있게 진행됐으나, 사망 현장에서 발견된 '아이폰'에 대한 디지털포렌식 작업이 중단되면서 일단 멈춰선 상태다. 박 전 시장 유족 측은 지난달 말 경찰의 디지털포렌식 작업을 중지해달라며 법원에 '집행정지'를 신청했고, 법원은 일단 이를 받아들였다.
디지털포렌식은 박 전 시장 변사의 진실을 밝힐 '스모킹건'으로 꼽혀왔다. 사망 직전 전화, 메시지 등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원에서 디지털포렌식을 둘러싼 재개, 중단 등 최종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수사는 보류될 수밖에 없게 됐다.
성추행 방조 수사는 그나마 진행되고 있다. 경찰은 최근 방조 혐의와 연관된 서울시 관계자 20여 명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이 역시 순탄치는 않은 양상이다. 경찰은 방조 혐의를 밝히기 위해 박 전 시장이 사용한 휴대전화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에서 기각당했다. 핵심 증거 장소로 지목되는 '서울시청 6층 비서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마저 법원에 의해 불발됐다.
경찰이 유일하게 가장 속도를 내는 수사는 '2차 피해' 부분이다. 2차 피해는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 피해자에 대한 인터넷상의 악성댓글이나 허위사실 유포가 핵심이다. 경찰은 지난달 말 클리앙, 이토렌트, FM코리아, 디시인사이드 등 웹사이트 4곳의 서버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해 관련 자료들을 상당수 입수했다. 이후 작성자들을 특정해 조사에 속도를 내는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이 지금 제대로 할 수 있는 수사는 사실상 2차 피해 부분 수사"라며 "나머지 수사들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박 전 시장 사망, ‘전례가 없는 수사’…희망은 인권위에?

이러한 지지부진한 상황은 어느 정도 예견돼 왔다. 박 전 시장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정범'(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사망한 상태에서 수사를 이렇게 진행하는 것은 전례가 없다는 것이 경찰 내부에 흐르는 인식이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역대 수사 역사상 이런 경우는 아마 처음일 것"이라며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박 전 시장의 휴대전화나 6층 비서실 압수수색 영장이 법원으로부터 기각된 것도, 박 전 시장 사망이 감안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법원 입장에서도 피의자가 사망한 사건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내주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김창룡 신임 경찰청장은 지난달 20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박 전 시장 수사에 대한 입장과 관련 "피고소인이 사망을 해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소권 없음'이 타당하다"면서도 "법 규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진상이 규명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의원들이 '진상조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질의를 쏟아냈지만, 김 청장은 '법 규정'을 반복했다. 법을 넘어선 수사는 불가능하고, 이는 곧 수사의 한계가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는 분석이 잇따랐다.
진상조사를 강조했던 여성단체들은 경찰의 강력한 수사를 요구하면서도 한계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는 기류가 흐른다. 피해자를 변호하는 김재련 변호사는 여성단체들과 함께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를 요구했다. 김 변호사와 여성단체는 피켓을 들고 인권위를 찾아갈 정도로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수사기관과 법조계에서 김 변호사에 대한 평가는 "앞에 나서는 것을 선호한다", "신중하다" 등 다소 엇갈리지만 '미투(MeToo·나도 당했다)' 변호에 대해선 전문가라는데 이견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김 변호사가 경찰 보다 인권위에 진상조사 무게를 싣는 것은 수사기관의 한계를 읽은 행보라는 해석도 나온다.
법조계 관계자는 "미투 사건이 발생하면 여성단체들도 김 변호사를 연결시켜주곤 한다"며 "오랫동안 관련 일을 해왔고,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지금의 행보가 최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 전 시장 측의 ‘반격’…줄다리기 계속 이어질 듯
인권위는 지난달 말 김 변호사 등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박 전 시장과 관련한 사건의 '직권조사'에 착수했다. 지난 5일에는 직권조사단을 꾸리며 기초 조사에 들어간 상태다.
하지만 진상조사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초반보다 다소 떨어지고, 수사 자체도 주춤한 상황에서 자칫 동력을 잃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제기된다. 최근 코로나19 '2차 대유행' 사태도 현장 및 관련자 조사에 변수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 와중에 박 전 시장 측의 '반격'도 하나둘씩 제기되는 상황이다. 전 비서실장 측의 방조 혐의 '강력 부인'이 이어지는 것이 시발점이 된 모양새다.
김주명 전 서울시장 비서실장은 지난 13일 경찰에 강제추행 방조 혐의 피고발인 신분으로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그는 "근무 기간 중에 성추행 피해 호소를 들은 바 없다. (피해자로부터) 전보 요청을 받은 사실이 없다. 성추행을 조직적으로 방조하거나 묵인하지 않았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오성규 전 비서실장 역시 지난 17일 경찰 조사 후 기자들과 만나 “고소 사실에 대한 실체적 진실이 확립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주변인에게 방조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방조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음해라고 생각한다"며 반박했다.
그는 또 “이 사건과 관련해 고소인 측의 주장만 제시됐고 객관적 근거를 통해 확인된 바는 없다. 이번 사건을 직접 경험하면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전가의 보도'가 돼 증거 재판주의를 무력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판단하게 된다"며 적극 반발하기도 했다.
박 전 시장 측의 반격에 피해자 측도 적극적으로 반박에 나서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들은 “피해자는 4년 동안 20여 명의 관계자에게 고충을 호소했다”며 “수많은 비서실 근무자들이 피해자의 성고충 관련 호소와 전보 요청 관련 대화에 연결되어 있음에도 역대 비서실장이 나서서 '몰랐다'고 부인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단체들은 이와 함께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 최근 감사원에 서울시에 대한 감사를 청구하는 등 진상규명을 위한 행동을 이어가고 있다.
답보에 빠졌지만 종결까지 아직 먼 길이 남은 경찰 수사와 직권조사를 결정한 인권위 차원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러한 ‘줄다리기’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경찰 고위 관계자는 “예상보다 훨씬 더 지지부진하고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 같다”라고 관측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