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이원희 인터뷰

명성에 비해 의외로 자료가 없었다. 인터뷰 전 사전 질문지를 보내야 하는 인터뷰어로서는 당혹스런 일이다. 하기야 작가(화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그와 직접 부딪치는 수밖에 없었다.
전방 100미터 앞에서 봐도 ‘나는 예술가!’로 보이는 이가 있다. 이원희 작가는 기질이 밖으로 넘치는 이가 아니다. 보기 드물게 젊어 보이는 60대 중반의 나이이다. 작품 세계와 인생관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듯하다. 많은 작가들이 삶과 예술을 뒤섞어 전력투구하다 못해 매몰되기도 한다.
구상 작가 이원희 호는 하양(河陽)이다. 그의 고향 경북 경산시 하양의 지명을 땄다. 하양은 국도 1호선이 지나던 금호강가의 소읍이며, 예전 ‘대구 사과’의 주산지이기도 하다. 하양은 겸재 정선이 45세 되던 1720년에 초임 현감으로 부임 6년간이나 재직하였다. 이원희는 성당 부속 유치원 선생님(수녀)으로부터 총명하다는 칭찬을 자주 받았다. 헌신적인 중학교 교장 신부님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파리 유학 위해 군 봉급 저축…결국 포기
그는 대구로 와 경북사대부고, 계명대 및 대학원 회화과를 마치고 1981년 육군학사장교1기, 포병 장교로 군에 갔다. 포병은 사경도(Panoramic Sketch, 寫景圖)작성을 위해 미대 출신의 간부가 필요하다. 프랑스 유학을 가기 위해 3년여 군대 봉급을 몽땅 저축했다.
보자르(Ecole des beaux-arts) 입학은 연령 제한에 걸렸다. 파리4, 8대학은 아예 실기실이 없었다. 그랑쇼미에르(Grande chaumie're)가 누드 실기실을 갖춘 정도였다. 유학을 포기했다. 형편이 되면 파리에 자주와 분위기를 익히며 독학해야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바야흐로 80년대 중반, 대학정원제가 도입되었다. 갑자기 많아진 학생을 가르칠 교수 요원이 부족했다. 대학 교수는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기위한 유일한 방편이었다.
미국에서 명문 고교와 대학을 경험한 계명대 신일희 총장은 좋은 제도, 질 높은 커리큘럼 구축과 함께 인재 영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원희가 서울로 진학하지 않고 계명대를 입학한 이유이다. 10여년이 지나 교수 요원을 채용하는 과정에서도 신 총장이 기울이는 정성을 보았다. 교수는 자신이 마땅히 가져야 되는 직업이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이원희는 작품 세계의 기반, 경로를 클래식에 둔다. 클래식은 말 그대로 ‘고전’이라는 뜻이며, 화가라면 사실 재현, 잘 그릴 수 있는 소양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캔버스와 붓, 유화를 다루는데 능숙한 인상주의를 말한다. 범위를 넓히면 모든 문화는 클래식을 바탕으로 발전해왔다. 주류가 현대·동시대 미술이다 보니 자신은 불편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고충 토로이기도 하다.
인상주의 전성기였으나 큐비즘이 태동된 1910년대 고희동(1886~1965)을 필두로 일본에서 받아들인 한국의 서양화는 일본화된 ‘외광파 아카데미즘’이다. 한국 현대 미술은 서구의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것이다. 작가들의 역량과 일본인 스승들의 소양 부족이다. 유화 재료가 가진 광택, 묘사의 가능성, 수정이 가능한 마티에르의 특성을 완벽하게 터득하지 못했다. 일제하 일본에서 교육받았고 전쟁 직후인 50년대 프랑스로 유학간 당대 최고 엘리트인 1.5세대들도 한계를 넘지 못했다. 2차 대전 후 경제 성장 지향적인 파리도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이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50~70년대 물자 부족의 국내 작업 환경이 추상 미술이 주류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도 한다. 작가들은 군용 텐트를 캔버스로 썼고 물감은 직접 만들어야 했다. 마티에르가 중요한 구상 창작에는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다.
주류와 주류에서 뻗어나온 가지를 구분한다. 음악으로 치면 쇤베르크에서 시작되어 존 케이지에 이르는 현대 음악의 장르를 가지로 본다.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작가이면서 미술 교육자들은 많은 고생을 했다. 열악한 교육 및 창작 환경은 생존을 위협했다. 생존이 최우선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인상주의 시대의 화려한 미술의 세례를 경험치 못한 작가, 미술 교육자들이 오랫동안 한국 화단의 주류가 된 흐름은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성공한 작가…시장가치 우선엔 회의적

경제 성장과 함께 이들 추상작가의 작품은 시장에서 절대 우위를 점했다.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가, 작품과 예술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작가, 작품이 구분되지 않고 혼재되었다. 이원희 본인은 상업 작가로 성공했음에도 이러한 시장가치가 최우선인 미술계를 비판한다.
한국의 20세기 미술을 중세 암흑기로 정의하고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세의 끝은 로마 가톨릭의 종말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문예부흥 운동을 가져왔다. 그는 더 구체적으로 들어갔다. 한국미술은 90년대 전과 후로 구분되어야한다는 주장이다. 핵심은 현대미술과 고전주의 미술이 같이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구가 90년대 이후 구상미술의 메카가 된 건 이원희를 필두로 김일해, 장이규 트로이카의 등장부터다. 이인성, 이쾌대 등 1세대 구상 작가들이 대구 출신이다. 그러나 80년대 말까지도 오지호, 임직순 등을 배출한 광주가 구상의 중심축을 형성했다. 대구는 세력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체인지 메이커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서구 현대미술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고전주의 회화의 맛이 살아있고, 동양화의 품격과 여유가 있다. 재능과 지적 능력, 체력, 심지어 인성마저 완성해버리는 어린 시절의 지리 풍토적 환경이 작가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유전적 심미안, 어린 시절부터 모필로 붓글씨를 쓰면서 붓을 다루는 감각이 더해진 듯하다.
“유화의 역사와 우리 근대 서양화 도입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작업 세계를 설정해 내고 있다. 유화의 점성을 수묵화의 느낌으로 풀어내고 있다.”(미술평론가 박영택)
이원희 특유의 ‘한국적 풍경’은 예술가가 운명적으로 난관을 돌파해 얻은 결과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자연이 바짝 마른 몸체를 드러내는 겨울 시절을 대상으로 한다.
1988년 파리 여행중 대중적인 아트페어를 참관하게 되었다. 한 군데 부스의 화랑 주인에게 ‘사실 나도 작가다’면서 1986년 전시 팸플릿에 있는 겨울 산야 풍경 이미지를 보여줬더니, 작품을 사고 싶다고 했다. 며칠이 지난 뒤, 사생에서 오는 느낌을 살린 세느 강변 작품을 주었다. ‘이런 풍경은 인상주의 시대부터 너무도 흔하다’면서 너희 풍경을 그려달라고 했다. 물론 세느 강변 작품은 그 화상이 약속대로 샀다.
귀국 후 현장 스케치를 통해 그 화상이 얘기한 ‘너희 풍경’을 찾았다. 인상주의 작품 연구에 몰두할 때이기도 했다. 1988년 말 망년회가 끝나고 안동 부근을 가게 되었다. 바짝 얼어붙은 논고랑, 밭고랑이 눈에 들어왔다. 풍경의 대상 자체가 방향성을 품고 있었다. 작업실을 서울 근교로 옮긴 지금도 경북 북부 지역을 종종 찾는다.
이러한 작품은 1989년 샘터화랑과 이목화랑 전시, 1991년 갤러리포커스에서의 전시는 인기 몰이에 들어갔다. 1994년에는 4개 화랑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가졌다. 100호 작품 60여점이 동시에 걸렸다. 상업적인 성공을 맛보았다. 1996년 전임 교수가 되었다.
풍경은 인연이다. 적합한 날씨, 대상의 매스에서 오는 아우라, 빛과 공기의 흐름, 심지어 황토 고유의 냄새마저 느껴져야 한다. 그 굳은 흙덩어리 아래 동면한 미꾸라지와 개구리도 있을 듯하면 금상첨화이지 않겠는가. 독특한 필선은 어린 시절 서예를 하면서 익힌 동양 붓을 잡았던 감각으로 뻣뻣한 서양 붓을 컨트롤하는 데서 나온다.
인상주의에서 중요한건 빛과 공기이다. 꾸미지 않고 색을 병치하면서 어지럽게 대상을 넣으면서도 선, 구도가 뚜렷해야 한다. 인상주의는 애초 자포니즘(Japonism)의 영향을 받았기에 동양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원희 풍경화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인물 초상, 미술사 장르로 평가 바라

이원희는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화 재료 쓰는) 초상화 작가이다. 풍경 작품이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1990년대 초, 전시회가 끝난 직후 LG 그룹에서 연락이 왔다. 회장실 방을 새로 꾸미는데 그림이 필요했다. 회장은 사냥을 좋아했다. 겨울 사냥 다니면서 눈에 익은 낙동강 풍경 그림을 그려줬고 값을 후하게 받았기에 선물로 회장의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회장은 자신의 초상화를 받자 바로 캐비닛에 넣었다. 부친의 초상화를 거는 게 먼저라고 했다. 명예 회장의 흉상과 전신상을 각각 그렸다. 당시 초상화들은 목우회풍으로 천편일률적이었고 고객들도 식상해 있었다.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주의 화단에서 ‘정확성’의 탐구, 재료에 대한 깊은 연구, 테크닉 문제에 천착할 수 있는 장르로 초상화의 가능성이 보였다. 회화 수업의 다양성 측면도 고려되었다. 주류 장르는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주문만 받으면 시장이 형성된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전시를 주관한 화랑이 고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건물에 세 들어 있었다. 그 화랑을 통해 김재순의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렸다. 이후 30년 동안 정치인들을 그렸다. 이원희는 동시대 대표적인 인물 초상이 미술사의 한 장르로 평가받았으면 한다.
그는 대화중 ‘무균질’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초상화 작품을 주문하는 고객들이 한국 사회의 파워엘리트라는 점을 의식해서이다. 그들을 가까이에서 대하다보면 나름 보통 인간으로 고뇌가 있고 누구나 그렇듯이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로 와 닿았다. 특권층에 대한 사회 일반의 비판과 작품의 모델이면서 고객과의 사이에서 오는 특별한 감정이리라.
재능을 타고 났더라도 결국 화가의 모든 것은 손에서 나온다. “정신이 천국에 있어도 손이 지옥에 있으면 지옥이 나온다” 머리, 가슴, 손은 같이 논다.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이를 가다듬는다. 훈련의 과정으로 공부를 한다. 미술평론가이자 예술사학자인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통해 작가들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하우저는 예술을 사회의 환경 변화 분야와 경제 활동의 일환으로 보았다. 예술을 특정분야로 제약하기보다 더욱 많은 대중으로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미술은 대중이 열광하는 시대에 꽃을 피웠다.” 인상주의를 탄생시킨 벨에포크(Belle Epoque : 1890~1914) 시대, 막상 인상주의 화가들은 비주류의 처지에 있었다.
작가는 그림으로 얘기하고, 작품은 팔려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우저는 작가들의 역할이 시대별로 바뀌어왔다고 말한다. 미켈란젤로는 귀족들의 기저귀도 디자인했다. 스펙트럼이 넓었다. 현대 미술 작가들은 산업 사회의 톱니바퀴 역할만 한다. 회화를 넘어 타 장르로 가지 않는 이유는 대량 생산을 강요받는 느낌이어서 이다. 누군가와의 협업은 작가가 직접 그리는 재미를 빼앗기는 것이다. 매일 작업실로 출근하는 것 또한 머리, 가슴, 손의 일치를 위한 훈련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3년여 전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교수라는 직업의 안정감에서 오는 데미지가 컸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생들한테 집중해야 하는 반면, 작업의 예리함과 손이 무뎌지는 걸 느꼈다.
“학장을 하면서 보니 작업을 반쯤 포기하고 있더라. 작업실에 가면 힘들었다. 손이 말을 안 들었다. 2007년부터 학교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작업을 다시 시작하면 언제든 손은 움직여주겠다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손이 완전히 돌아오는데 10년쯤 걸린 것 같다.”고 토로한다.
학생들하고 간격도 컸다. 아무리 노력해도 신입생들하고는 45년 이상의 물리적 차이가 있다. 나름 노력을 하였으나 교육 현실에 대한 회의감도 컸다.
그는 해외 진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다. 자신이 작업을 잘 할 수 있는 곳이 여건상 한국이다. 한 때 중국 시장에 관심이 있었다. 글로벌 시장은 어차피 yBA(young British artists)를 만들어낸 컬렉터 사치 부류들이 선호하는 스타일 작품이 주류이기도 하다. 자신은 온 몸을 던져 불사르는 고뇌형 보다는 즐거워야 작업이 잘되는 모차르트형이라고 자평한다.
미술교육…"재능있는 학생 굳이 대학 갈 필요 없다"

자신도 오랫동안 몸담았던 미술 대학 교육 체제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기까지 하다. 한국의 미술 대학은 천재가 될 수 있는 이들을 입학시켜 바보 만드는 시스템이라고 여지없이 비판한다. 학생들은 탁월한 기량을 가지고 있어 배울 수 있고,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어 동기부여가 되는 스승을 만나기 쉽지 않다.
한국 미술교육 제도와 미술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러시아와 중국을 다니면서 굳어졌다.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은 고전 미술 중심의 교육관이 중심에 있다. 레핀 스쿨은 300년 전통의 교육 시스템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19세기와 20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1844. ~ 1930) 과의 인연은 모교인 계명대학 미술대 전임이 된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동아미술관에서 개최한 일리야 레핀 전시를 보러갔다. 원화 작품은 물성과 아우라에서 독보적이었다. ’이런 게 그림이구나!‘를 스승과 제자가 동시에 느꼈다. 1997년부터 매년 여름 제자들을 이끌고 3주~1달 씩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의 레핀 스쿨로 실기 연수를 떠났다. 러시아에서는 비구상을 그래픽이라고 한다. 칸딘스키와 말레비치도 찬 밥 신세이다.
이들은 접근 방식자체가 틀리다. 레핀 스쿨은 예술원 산하 기관이다. 6년 과정이고 입학하면 예비 작가로 대우받는다. 철저하게 실기 위주이다. 누드모델만 200여명이다. 인물화 수업 시간은 매일 유화 3시간, 소묘 2시간을 3주를 연속해서 가르친다. 이렇게 배운 학생들은 작품의 밀도 자체가 다르다.
2008년 연구년을 중국 천진 미술대학에서 보냈다. 공필화(工筆畵)의 대가 허쟈잉(何家英) 교수 연구실 출신들의 파워를 목도했다. 허쟈잉 작품은 중국 경매 시장에서 연간 1000여억 원의 시장 규모를 형성한다. 이 연구실 출신 작가라는 레테르가 붙으면 작품이 팔렸다. 입학생들이 몇 년씩 입학을 기다렸다. 학교에서는 연구실을 임대 분양도 한다.
허쟈잉 교수의 딸이 베이징 중앙학원에서 배웠다. 여성이 입고 있는 치마를 표현하는데 50번은 겹쳐 칠한다. 밀도 차이에서 오는 작품의 아우라가 확연히 다르다. 국내에서는 공필화를 배울 데가 아예 없다.
“유럽의 미술 교육의 중심은 미술관이다. 재능 있는 학생들은 미술관에서 살게 해야 한다. 루브르 미술관은 사전에 신청하면 학생들에게 원화의 카피 그림을 그리게 해준다. 루브르를 옮겨와야 한다. 모사 작품으로만 옮겨와도 의미가 있다. 교육 사업의 의미가 있다. 살아있는 교육을 하고 싶다.” 재능 있는 학생들이 굳이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게 그와 나의 일치된 의견이다.
교수직을 그만두었어도 미술교육 제도에 대한 관심을 놓지 못한다. 클래식 음악계의 조성진과 BTS가 공존하듯이 고전주의와 동시대 미술은 병행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