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 <선구자>의 진실 (1)
봄비를 맞으며 마산으로
2014년 4월 12일. 이날 오전 중부지방에는 흐린 날씨에 가는 비가 흩뿌렸다. 청주를 거쳐 마산음악관과 마산문학관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4년 전, 가곡 에세이 <사랑의 시, 이별의 노래> 취재를 위해 마산문학관에는 잠시 다녀 온 일이 있으나 마산음악관에는 들르지 못했었다.
이날 아침 마산음악관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30분. 주차장에 차를 대고 조각공원 안에 있는 음악관으로 들어가는데 오른쪽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정자위의 현판에 일송정(一松亭)이라고 써있다.

아하! 만주 용정의 일송정을 본떠서 세워놨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그런데 정자 바로 앞에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작지 않은 화강암 비석이 하나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무언가를 써 놓았던 것을 지웠던 자국이 있다.
‘가곡 선구자 가사가 적혀있던 것을 반대 여론 때문에 지웠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안쓰러웠다.
일송정 옆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가지가 조화롭게 펴진 잘 생긴 소나무였다. 바로 옆 잔디 위에는 기증자의 이름이 새겨진 자그마한 검정색 기증석이 세워져있다. 다음과 같이 써있었다.
“금번 조두남 기념공원이 이곳에 만들어지면서 중국 용정시(龍井市)에 있는 일송정을 재현하게 됨에따라 우리 의원 일동은 일송(一松)을 기증하여 독립을 갈구했던 선구자의 푸른 기상을 영원히 기리고자 한다. 2002. 6. 25 마산시의회(제3대) 의원 일동 (이름 생략)”
자그마한 음악관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이날 첫 방문객인가 보다. 젊은 직원이 전시실의 불을 켰다.
이 직원에게 확인할 겸 모른체하고 물었다.
“저 쪽 정자옆 비석에 무엇이 써있던 것을 지운것 같은데 무엇이었소?”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왔다.
나이 좀 든 직원이 옆에 있었다.
이 분 역시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음악관과 관련해 친일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전시실은 소박했다.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 선생의 유품과 지역 음악계에 끼친 업적 등을 적은 전시물이 전체의 반쯤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공간엔 이 지역 출신인 가곡 <고향의 노래>의 작곡가 이수인, 동요 <산토끼>의 작곡가 이일래, 가요 <불효자는 웁니다> <산장의 여인> <울고넘는 박달재>의 작사가 반야월(본명 박창오)선생의 사진과 간략한 설명이 한쪽 벽에 붙어있다. 그밖에 ‘근대 창원 음악의 흐름’이란 제목으로 이 지역의 음악 발달사가 또 다른쪽 벽면에 트럼펫 등 전시물과 함께 길다랗게 적혀있었다.

조두남 기념관에서 마산음악관으로 바뀐 사연
음악관은 마산조각공원 안에 있는데, 공원 앞쪽에는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 물론 모형이다. 선구자 가사에 나오는 ‘용두레 우물가’의 모습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산음악관은 원래 조두남기념관이었다. 마산시가 '선구자'를 작곡한 조두남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지역의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위해 11억원의 에산을 투입하고 유족들로부터 각종 자료 1천200여점을 기증 받아 2003년 5월 개관했다.
그런데 시민단체 등이 조두남 선생의 친일의혹을 강력히 제기하면서 조두남기념관은 개관한지 1개월도 안돼 휴관에 들어갔다. 이후 마산시와 시의회가 여론수렴 과정을 거쳐 이름을 마산음악관으로 바꾸고 전시내용도 조두남 선생을 비롯해 이수인, 이일래 작곡가 등 지역 출신음악가로 확대키로 결정하고 2005년 6월 재개관케 된 것이다.
대표적인 항일 가곡으로 알려졌던 <선구자>. 만주 벌판에서 말달리던 우리의 선조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면서 우리 민족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노래. 이 노래의 작곡과 관련해 조두남 선생이 생전에 남긴 글이 남아있다.

조두남이 쓴 <선구자> 작곡의 전말
조두남은 191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지배가 시작된지 2년 후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7세 때 미국인 캐논스(J. Cannons) 신부에게 작곡을 배워 11세 되던 해인 1923년 가곡 <옛 이야기>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18세 때 부친을 잃은 후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무작정 집을 나가 만주로 가 고향집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봉천과 하얼빈 등에서 방랑생활을 했다.
그가 <선구자>(최초의 제목은 <용정의 노래>)의 작가 윤해영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스무살 때인 1932년. 목단강 주변의 어느 싸구려 여인숙에 묵고 있을 때였다. 강변을 거닐다 동네 어귀에서 여인숙 주인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말하기를 일본 형사같은 사람이 찾아와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반가워 할 일이 아니었다.
조두남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82년 와병 중에 펴낸 제2 수상집 <그리움>에서 <선구자>의 작사자 윤해영을 만난 일을 ‘윤해영과의 상봉’이란 소제목 아래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조금 길지만 원문을 그대로 옮긴다.)
윤해영과의 상봉
그 시절 만주에서는 낯선 사람의 방문을 받는다는 것은 반갑기 보다는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만주에서는 당시 이웃사람 끼리 서로 만나서도 서로의 과거를 알려고 들지도 말하려 들지도 않았다.
방에서 기다리는 낯선 객이 일본인 형사같더라는 말에 적이 두려운 심정으로 그를 만났다. 그 사람은 조그마한 키의 깡마른 체구에 낡은 외투를 걸친 초췌한 차림의 젊은이였다. 그는 귀에 익은 함경도 사투리로 자기는 윤해영이라는 사람으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보다 서너살 위로 보이는 윤씨의 눈빛은 침착하고 강력했으며 깊은 신념과 의지가 담겨 있어서 아무리 보아도 장사하는 사람의 눈빛은 아니었다.
“조선생이 작곡을 하신다는 말씀은 벌써부터 들어 왔습니다만 이곳 저곳 떠돌아 다니다 보니 이제야 찾게 되었습니다. 조선생께 부탁드릴 것은 이곳에 흘러 들어와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시원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연신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해대는 그는 고생으로 시달린 풍상의 흔적과 병색이 완연했지만 예리하게 번득이는 그의 눈엔 뭔가 새로운 저항과 저력이 있는 듯 했다.
윤해영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구깃구깃한 종이 한 장을 내 앞에다 내 놓았다. 거기에는 <용정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로 시작되는 세절의 시가 적혀 있었다. (계속) (글/사진: 이정식, 세종경제신문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