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활동에 대한 내조와 갈등 유사점 많아

▲ 모스크바 남쪽 야스나야 폴라냐 톨스토이 영지의 톨스토이 저택. /이정식 nocut2009@gmail.com

♦ 톨스토이의 가출과 <유정> 주인공 최석의 가출

춘원 이광수(1892~1950) 소설 <유정>의 배경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다. 주인공 ‘최석’이 집을 나와 바이칼호 인근 시베리아의 산림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최석이 가출한 이유는 히스테릭한 부인 때문이다. 어려서 데려다 키운 남편 친구의 딸 남정임과 남편의 사이를 의심한 나머지 부인은 남편 최석이 해선 안될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며 난리를 피운다.

부인의 이같은 행위로 인해 최석은 결국 사회적으로 매도 당하고, 교장직을 사임한 후 죽기 위해 시베리아로 들어간다.

소설 <유정> 속에서의 이같은 최석 부인의 모습과 최석의 가출, 그리고 죽음은 아내 소피아(1844~1919)와의 갈등으로 인해 야스나야 폴라냐의 집에서 가출했다가 시골 간이역 아스타포보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톨스토이(1828~1910)의 최후를 떠올리게 한다.

이광수의 작품들에서 때때로 톨스토이의 흔적이 보이는 것은 그가 중학 시절부터 톨스토이를 사숙(私淑: 직접 가르침은 안 받았으나 스스로 그 사람의 덕을 사모하고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한 톨스토이주의자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엄청난 영지를 가진 부유한 귀족(백작)이었으나 말년에 토지사유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땅을 비롯한 전 재산을 농민 등에게 나눠주려고 했고 소피아는 극력 반대했다.

“재산을 모두 다 나눠주면 남은 가족은 어떻게 사느냐”는 거였다. 같은 부부간의 갈등이지만 이광수 소설 <유정> 속의 갈등과는 성격이 다른 갈등이다.

♦ 소피아를 비난하지 말라

▲ 젊은 시절의 톨스토이(왼쪽)와 부인 소피아.

그러한 갈등 상황 속에서 톨스토이가 몰래 집을 나왔다가 며칠만에 죽었기 때문에 소피아는 종종 악처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지난 5월초 톨스토이의 생가며 영지가 있는,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약 200km가량 떨어진 야스나야 폴라냐를 찾아갔을 때 그곳의 러시아인 여성 안내자는 톨스토이 저택 내부를 둘러 본 후 숲속에 있는 묘소로 가기에 앞서 한참동안 톨스토이 가출 당시 소피아의 입장에 대해 설명했다. 안내자는, 소피아를 악처로 보고 욕해서는 안된다면서, “그녀는 여자로서 아내로서 또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소피아의 입장을 두둔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소피아는 톨스토이와의 사이에 13명의 아이를 낳았고(이중 8명만 성장함),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쓸 때 7번이나 정서를 하는 등 평생 톨스토이의 작품 활동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말년에 요구했던 전재산의 포기는 받아 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 비석 하나 없는 톨스토이 무덤

▲ 야스나야 폴라야 영지 숲속의 톨스토이 묘지. / /이정식 nocut2009@gmail.com

세 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있는 야스나야 폴라냐의 거대한 톨스토이 영지에는 따뜻한 봄볕 속에 연두색 솜털 같은 초봄의 푸른 기운이 한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곳의 5월초의 풍경은 기온 등이 우리나라의 4월초와 비슷한 듯 했다. 나무 가지에는 그제야 겨우 파르스름한 새 순이 돋아나고 있다.

톨스토이의 무덤은 저택에서 10분 남짓 걸리는 영지 안의 숲 속에 있었다. 가는 길에는 중간 중간 화살 표지가 서있었으나 정작 무덤 앞에는 손가락 굵기 정도의 나뭇가지를 휘어 공원의 꽃밭에서 흔히 보는 반원형의 낮은 울타리를 쳐놓았을 뿐 비석이고 뭐고 아무 표시도 없었다.

파란 잔디에 덮인 길다란 관모양의 직육면체 흙더미가 무덤임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톨스토이 사망 초기에는 무덤 주위에 나지막한 나무 울타리가 처져있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부인 소피아의 무덤은 영지 인근 코차코프스키의 톨스토이 가족 묘지에 따로 있다고 한다.

톨스토이 영지에서 특이했던 것은 나무로 만든 모든 방향 안내 화살 표지에 러시아어·영어 등과 함께 동양어로는 한글이 유일하게 표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삼성전자가 지난 2003년 톨스토이 탄생 175주년을 맞아 레프 톨스토이 박물관과 함께 ‘톨스토이 문학상’을 제정하고 이후 꾸준히 후원해온 인연 때문이라고 했다. 표지판은 영지 내에 한 두개가 아니다. 한국인 방문객으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다. 인터넷으로 불과 수년전(1912년)의 표지판 사진을 보니 러시아어와 영어 뿐이었다. 한글이 들어 있는 나무 표지판으로 바뀐 것은 오래되지 않은 일인 듯 하였다.

‘톨스토이 문학상’은 제정된 이후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가 되었다.

♦ 부인(허영숙)에게 눌려 지낸 이광수

▲ 젊은 시절의 허영숙(왼쪽)과 노년의 허영숙.

<유정>속 주인공 최석의 가출과 사망은 톨스토이의 가출과 사망을 생각나게 하는 면이 있지만, 최석의 부인과의 갈등은 춘원과 부인 허영숙의 관계에서도 모티브를 찾을 수 있지 않나 하는 분석도 있다.

이광수는 두 번째 아내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개업의인 허영숙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으나 이후 줄곧 아내에게 눌려 살았던 것 같다.

<유정> 속에서 아내의 감정 변화를 분석하는 조용한 성격의 최석의 모습은 바로 이광수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마찬가지로 최석 부인에게서 보이는 성격적 일면 역시 허영숙의 어떤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유정>에서 최석이 시베리아로 가출하는 상황 설정은 가정에서 부인에게 늘 눌려 지냈던 이광수의 정신적 도피 심리를 나타낸 것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그러한 분석은 근거가 적지 않다. 이광수가 1930년 <별건곤(別乾坤)>이란 잡지 10월호에 짤막하게 쓴 ‘부인 허영숙씨에 대하여’란 글도 그중 하나다.

“(허영숙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나보다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라든지 신변에 관해서 간섭을 아니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면, 늙은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하듯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모두가 미덥지가 못하고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는 모양이지요.

그래서 그러한 일로 전에는 싸움도 많이 했지만 인제는 싸움을 할 용기도 나지 아니하고 해서 그저 복종을 할 따름입니다.

내 신변에 관해서는 심지어 구두, 양말까지도 전부 참견을 합니다그려, 허허······”

♦ 허영숙의 후회

▲ 이광수와 당시의 문인들. 왼쪽부터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

이광수는 6·25 직후 납북됐다. 와병 중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피난도 가지 못했다. 전쟁이 터지고 3일만에 인민군이 서울로 들이닥쳤다.

이광수는 전쟁 난 다음 달인 1950년 7월 12일 여름 셔츠만 입은 채로 인민군에게 끌려 북으로 갔다. 그후론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이광수는 납북 석달 후인 1950년 10월 사망했으나 가족이 북한에 들어가 그의 사망을 확인한 것은 수십년 후의 일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허영숙은 남편의 소설과 글들을 모아 전집을 출간할 생각으로 1956년 이광수의 ‘광’과 허영숙의 ‘영’을 합친 이름의 광영사라는 출판사를 효자동의 자택 겸 병원이었던 허영숙 산원에 세웠다. 

그러나 흩어져있는 글들을 모아 전집을 만든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광영사 이름으로 <춘원선집> 24권을 내긴 했지만 미진하여, 결국은 몇 년 후 조직이 갖춰져 있는 삼중당의 도움을 받아서 제대로 된 <이광수 전집> 20권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삼중당에서의 전집 출간은 1960년대에 수년에 걸쳐 진행됐다.

이에 앞서 허영숙은 1955년 문선사(文宣社)란 출판사에서 <사랑하는 영숙(英肅)에게>란 제목으로 젊은 시절 이광수가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책을 낼 때 출판사의 요청으로 납북된 남편 이광수를 그리는 ‘남편 춘원을 생각하고’란 제목의 애절한 글을 여기에 실었다. 이 글은 10폰트 글자로 A4용지 12매에 이르는 짧지 않은 분량이다. 글에는 허영숙이 결혼생활 동안 남편에게 심한게 한 것을 자책하고 후회하는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일반이 잘 모르던 춘원의 모습도 들어 있다. 일부를 인용한다.

♦ ‘남편 춘원을 생각하고’-허영숙

▲ 야스나야 폴라냐 톨스토이 영지 입구의 호수. /이정식 nocut2009@gmail.com

나는 당신과 삼십여 년을 살았고 그 반 이상을 병구완만 하고 지냈습니다마는 나는 당신에게 좋은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인격의 가치를 깊이 깨닫고 높이 받들고 묵묵히 복종하는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잘난 것처럼 잘난 체를 하고 내 말이 옳고 당신 말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아내였습니다. 당신을 떠나 육 년 동안 깊이 반성해 본 후에 당신의 가치를 이제야 겨우 알았사오며 내가 교만하고 잘난 체한 것이 이렇게 뼈아프게 후회되나이다. 이제 당신을 다시 만나기만 한다면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아니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이제 당신을 다시 만나기만 한다면 내 무덤에 ‘이광수의 착한 아내’라고 쓰기에 넉넉하리만치 섬기오리다. 그러나 당신을 어디 가 만나오리까. 만날 길이 없나이다. 세상에 잃어버린 남편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나는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남편에 대한 사모의 정보다 내 죄를 사과하고자 하는 정이 더 간절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어디 가 만나오리까.

······

나는 당신이 아직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점점 날이 갈수록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병이 많은 당신, 혈압이 높고, 신장이 하나밖에 없고, 늑골이 두 마디가 끊어지고 척추가 세 마디가 썩고, 폐가 삼분지 이밖에 황량이 없는 당신이 어떻게 지금껏 사셨기를 바라오리까.

내가 밤낮 내 손으로 좋은 음식을 만들고 따뜻한 아랫목에 앞둥그리처럼 위하였더라도 당신의 신체로 육십사라는 고령을 넘기기가 어려울 터인데, 그 공산당의 무서운 학대와 위협 아래 어떻게 지금까지 사셨기를 바랄 수가 있사오리까.

······

바로 혼인하던 날 저녁에 당신은 병석에 누워 거의 팔 년 동안을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이의 쓴 글은 모두 누워서 쓰셨거나 내가 대필한 것입니다. 나는 혼인하고도 여덟 해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당신의 병구완으로 좋은 시절을 다 보냈지마는 나는 당신의 좋은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잘나고 당신은 내 덕에 사시는 것처럼 나는 당신을 휘둘렀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괴로운 부부생활을 하셨습니까. 나는 당신하고 같이 사는 동안 당신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혹은 물질적으로 평가하고 혹은 육체적으로 평가하여 당신을 괴롭혔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이 우리의 이혼사건입니다.

♦ 허영숙이 밝힌 이광수와의 이혼 사유 세 가지

▲ 톨스토이 묘지로 가는 숲길. /이정식 nocut2009@gmail.com

이광수·허영숙 두사람의 이혼은 해방 후 이광수가 친일파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허영숙이 혼자 저지른 일이다. 허영숙은 이광수의 오산학교 제자인 백병원 설립자 백인제 씨의 친동생 백붕제 변호사(형제 모두 6·25때 납북)와 상의하여 이광수가 경기도 사릉에서 지낼 때 남편도 모르게 이혼 수속을 하였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봄의 일이다. 허영숙은 백붕제 변호사와 함께 종로구청 호적계를 찾아가 이혼수속을 끝냈다. ‘이광수의 지병으로 인한 오랜 병간호와 이 씨의 생활력 부족으로 부부생활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란 게 이유였다.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 가장 컸다. 이에 대해 허영숙은 계속되는 이 글 ‘남편 춘원을 생각하고’에서 이혼 사건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광수를 따르던 시인 모윤숙(1910~1990) 등 일부 여성들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혼 사건이 있었던 1946년 겨울 사릉에 있던 춘원은 돌베개를 베고 자다 입이 돌아간 일까지 있었다. 허영숙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지금은 우리의 이혼사건이 식어진 옛날의 넌센스로 돌아가게 되었지마는 춘원이 친일파로 몰리자마자 허영숙이와 이혼했다는 사실은 여러 사람의 흥미를 끄는 소문이 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이혼수속이 끝난 지 다섯 시간 만에 각 신문은 삼단 이상으로 제목을 잡아 특제하였습니다. 이광수는 마침내 아내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허영숙이는 삼십 년 해로하던 남편, 삼 남매의 아버지인 이광수에게 최후의 돌멩이를 던졌다, 이렇게 떠들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춘원은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혼한 이유는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 나는 원래가 서울 한바닥 종로 상인 허종 이란 분의 막내딸로 자라났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드름전(포목상)도 하셨고 배전(배만 파는 곳)도 하셨고 집장사도 하시고 종종 고리대금도 좀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난 나는 물질이라든지 금전에 대해서 담박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일확천금을 하려고 서두르지는 아니하였어도 절검저축을 목적으로 삼고 한 가정의 장래의 생활을 위해서는 남의 일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당신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춘원을 잘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춘원은 돈이라든지 물질이라든지에는 거의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거지가 문전에 오면 나는 일 전짜리를 주지마는 춘원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일 원짜리도 십 원 짜리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물건을 살 때에 깎는 사람을 제일 나쁜 사람으로 아는 분이었습니다. 장사꾼이야 더 달래든 에누리를 하든 말든 나마저 같이 물건값을 깎고 안산다고 했다 산다고 했다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더 잘 사지도 못할 것이다. 이런 논법이었습니다. 내가 도둑을 맞아 울고 앉아있으면 참 잘되었다고, 이제는 도둑 맞을까 걱정할 것 없으니 보약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에 이할 것이라고 하도 좋아했습니다. 나더러 종로 한복판 상인의 딸이라고 조롱 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가정 생활하는 데 큰 고통거리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

은행 보증을 서서 차압의 독촉장들이 나오고 가난한 친구들의 방문으로 제때에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방문객이 많아 병환이 나고 그 병구완은 나 혼자 도맡아 하게 되니 가정생활의 충돌이 자주 생겼습니다. 지금 나이 육십이 되어 남편을 잃어버린 자리에 앉아 생각하면 그것이 다 내 잘못이며 이제 다시 안 그러리라 깨닫지마는 젊은 시절 상인의 가정에서 자란 나로서는 진정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 그리하여 이 분 하고 이러고 살다가는 늙게 아이들 공부도 못 시키고 거지가 되겠다 하는 것이 내가 이혼한 이유의 하나였습니다.

둘째로 내가 이혼한 이유는 반민법 때문이었습니다. 국회에서 정한 반민법 법규에 의하면 중한 자는 사형, 종신, 십오 년 이상, 경한 자는 재산 몰수하고, 귀양 보낸다.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원래부터 춘원이 여기에 걸려서 죄를 받으리라고는 믿지 아니했지마는 재산몰수를 당하지나 아니할까 하는 의심을 혼자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개 다른 나라의 예를 볼지라도 정치적 소동이 일어나면 그 일에 흥분된 민중들은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날뛰면서 잔인한 행동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내 이혼문제에 대해서는 북쪽으로 납치되어 가신 P(백붕제)변호사(당신의 친구)께서 많이 조언해 주셨으며 그것은 전혀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P변호사가 안 계셨더라면 내가 할 줄 몰라서도 또는 겁이 나서 못 하였을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재산이라야 내가 친정에서 가지고 시집온 집 두어 채 논 마지기였던 것이나 만일 그것조차 빼앗기면 우리 아이들의 장래가 암담했기 때문입니다.

······

♦ 세번째 이혼 사유는 춘원 주위의 여자들 때문

▲ 한글이 들어있는 톨스토이 묘지 방향 표지판. /이정식 nocut2009@gmail.com

내가 이혼한 원인의 마지막 이유는, 춘원을 따르는 여성이 많았던 것입니다. 혹은 문학을 배우러 오고 원고를 가지러 오고, 문학 이야기를 하러 오시라고도 오고, 원고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도 오고, 춘원의 방에는 문학소녀의 센티멘탈한 그림자가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병이 나서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도 여자들이 늘 와 있어서 내가 가도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할 틈이 없는 것이 나는 끔찍이도 싫었습니다. R양, P양 M여사, L여사, 미망인 N, K, 기생 출신, 또 K양, 꼽아보면 열 사람은 됩니다. (주: 모윤숙, 김일엽, 나혜석 등으로 추정된다.)

춘원이 그들을 찾아간다든지 은근히 둘이 만난다든지 그런 일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늘 앓고 있었고, 또 춘원은 양심적이기 때문에, 나를 속이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나는 믿습니다마는 그들이 찾아다니는 것이 나는 싫었습니다. 춘원은 나더러 “어머니나 형님과 같은 마음으로, 그 여자들을 애무해 주라” 그러지마는 나는 그러한 선녀 같은 마음을 가질 줄 모릅니다. 마침내 M여사와 P양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떠들게 되었습니다. 춘원을 두고 시집을 썼느니(주: 모윤숙이 1937년에 낸 시집 <렌의 애가>를 말함. <유정>의 여주인공 남정임의 모델이 모윤숙이란 얘기도 있다), 이십 리나 떨어진 춘원의 정양처인 자하문 밖으로 매일같이 방문을 한다는 둥, P양은 내가 일본 가 있는 동안에 영근이의 가정교사로 집에다 데려다 두었다는 둥 – 나는 이 여러 가지 소문을 듣는 게 싫었습니다. 춘원이 그 여자들하고 세상 사람이 말하는 그러한 저속한 연애에 빠지지 아니 하리라고는 깊이 믿는 바이지마는 공연히 쓸데없이 내 존재를 무시하는 짓을 하고 있는 것 같고, 몸이 조금 건강해지면 이런 소문을 내고, 그 계집 아이들과의 교제에 피곤하여 병이 나면 그 병구완은 내가 하게 되고, 나에게는 얼마나 원통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런 일 저런 일로 내가 몰래 민적을 갈라놓고 가만히 되어가는 모양을 보자고 한 것이 이렇게 나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

나는 춘원에게 과연 매달려 산 사람이었습니다. 입으로는 강한 체하고 잘난 체했지마는 기실은 춘원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살다가 그 줄이 끊어지니, 나는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이제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이 오만한 마음을 다 버리고 당신을 섬기고 복종하는 좋은 아내가 되겠습니다. 나는 꼭 당신을 만나야 되겠습니다. 이대로는 죽어도 눈을 못 감겠나이다. 당신을 이 세상에서 한번 다시 만나 잘 복종하는 아내로써 섬기다가 죽사와지이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살아계십니까, 살아계시면 어느 곳에 계십니까, 진정으로 살아계신 줄만 안다면은 괴나리 봇짐 짊어지고 지팽이 짚고, 삼천세계를 다 돌아 걸어도 당신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언마는 그것조차 못 하는 이 슬픔이여! - 1955. 10.20

♦ 시베리아 기행문으로 쓰려다 소설이 된 <유정>

▲ 27세때(1919년)의 춘원 이광수와 최초 출간된 소설 '유정'(1934년으로 추정)의 표지.

춘원 이광수의 <유정>은 당초 기행문으로 구상됐던 것이다. 그는 청년시절 자신이 경험했던 시베리아와 바이칼 호수의 이야기를 신문에 기행문 형식으로 실으려고 했다가 소설로 만들어 연재하게 되었다.

<유정>이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1933년 10월은 이광수가 7년간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자리에 있다가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직후였다. 이광수는 이해 8월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했다. <유정>은 말하자면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긴 후 처음 쓴 ‘신고작’(申告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광수는 <유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한 7년 후인 1940년 10월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시인, 1901 ~ 1950년 납북)이 운영하던 월간지 <삼천리>에 실은 ‘<단종애사>와 <유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전에도 시베리아 방랑시절에 한 번 보기는 했지만, 그 후 재차 하얼빈에서 치치하얼을 거쳐 만주리로 갈 때 보주선(寶州線, 만주서부선 즉,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연결되는 철로) 그 일망무제한 넓은 벌을 석양에 지나가게 되는데, 붉은 낙조의 세례를 받는 광야의 특유한 풍경은 실로 한 장관을 정(呈)하고(주: 나타내고) 있어서 그것을 꼭 한번 기행문으로 쓰려고 마음먹고 동아일보에 쓰려 하다가 그만 조선일보사로 자리를 옮기자 중지했으며, 그 후 이야기를 집어넣어서 소설화시키는 것도 매우 좋으리라 생각하고 <유정>이란 제목을 붙여 소설화시킨 것이다.”(<삼천리>, 1940년 10월)

그런데 위의 글을 보면 “재차 하얼빈에서 치치하얼을 거쳐 만주리로 갈 때”란 말이 나온다. 이광수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던 1914년 그 때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만주로 지나갔다. 만주 북쪽 도시 만주리를 지나면 얼마 안가 러시아 영토인 치타에 도착한다. 그것이 최초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동쪽 노선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를 지나는 지금의 노선은 1916년에 완공됐다.   

이광수는 시베리아 치타에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했다. 22세 때다. 그 후 다시 시베리아에 갔던 기록은 없으나 18년 후인 1932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만주를 시찰했던 일은 있다. 기록에는 당시 이광수가 시찰차 갔던 곳은 심양, 안산, 대련 등 남만주 지역이었다. 그래서 “재차”라는 그 대목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이광수는 해방 후인 1948년에 쓴 <나의 고백>에도 다음과 같이 <유정>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적어 놓았다.

“나는 한달동안 추정[秋汀, 독립운동가 이갑(李甲, 1877~1917)의 호]의 말동무를 하다가 눈이 많이 내리는 어느 밤 기차로 물린(穆陵, 우리말로는 목릉이며 현재 중국어 발음으로는 무링)을 떠나서 치타로 갔다. 치타는 아라사(러시아) 땅으로서 바이칼주의 수부(수도)다. 눈 덮인 몽고 사막과 흥안령을 넘어서 시베리아로 달리는 감상은 비길데 없이 광막하여서 청년 나의 꿈을 자아냄이 많았다. 나의 소설 <유정>은 이 길을 왕복하던 인상을 적은 것이다.” ( <나의 고백>, 춘추사, 1948.12)

대한제국 무관 출신인 추정 이갑은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중 1911년경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병을 얻어 당시 거의 전신마비 상태로 길림성 무링에서 요양중에 있었으며 이광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곳으로 가 약 한달간 추정의 말동무 겸 편지 대필 등을 하였다

<유정>은 조선일보에 1933년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재됐는데, 연재에 앞서 9월 22일 조선일보 지면에 <유정>을 예고하는 다음과 같은 작자의 말을 실었다.

“나는 인생 생활을 움직이는 힘 중에 가장 힘있는 것이 인정인 것을 믿습니다. (···) 나는 순전히 정으로만 된 이야기를 써 보고 싶습니다. 사랑과 미움과 질투와 원망과 절망과 희한한 흥분과 침울 등등, 인정만으로 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최석이라는 지위 있고, 명망 있고 양심 날카로운 중년 남자와 남정임이라는 마음 깨끗하고 몸 아름다운 젊은 여자와의 사랑으로부터 생기는 인정의 슬픈 이야기를 써 보자는 것이 이 <유정>이라는 소설입니다.

나는 22, 23세의 도무지 아무 것에도 구속을 받지 않는 열정에 타는 어리던 시절로 돌아가서 열성이 쏟는대로 이 이야기를 써 보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뜨겁고 아름답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지이다 하고 빌 뿐입니다.(조선일보, 1933년 9월 22일)

♦ 이광수 작품에 많은 영향 준 시베리아 방랑

▲ 모스크바 톨스토이 박물관 정원의 톨스토이 동상 앞에서 필자.

이처럼 이광수의 22, 23세 시절 시베리아 방랑의 경험은 그의 일생을 통해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고 있다. 장편 소설 <유정>(1933)은 물론이거니와 <어린 벗에게>(단편, 1917), <시베리아의 이갑>(수필, 1931), <무명씨전>(단편,1931), <그의 자서전>(장편,1936), <다난한 반생의 도정>(자전,1936), <나의 고백>(자전, 1948) 등 많은 작품 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가운데 <유정>외에 시베리아 이야기가 가장 많이 들어있는 것은 <그의 자서전>과 <나의 고백>이다.

이 작품들을 보면 이광수의 러시아와 시베리아에 대한 애착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이광수가 중학시절 이래로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톨스토이주의자이기도 했지만, 시베리아 치타에서의 경험과 러시아인들에게서 받은 인상 또한 러시아에 대해 좋은 기억을 평생 갖게 하였다.

[ 설레는 10월 러시아 문학기행..."미리 알고 가면 더 재미있어요" 6·7월엔 인문강좌 개최 ]

▲ 모스크바 톨스토이 공원의 톨스토이 동상. /이정식 nocut2009@gmail.com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러시아 문호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러시아 문학기행’이 국내 최대 여성지 ‘우먼센스’ 주최로 오는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7박8일의 일정으로 실시된다.

바이칼 BK투어와 함께 진행하는 이번 ‘러시아 문학기행’에서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문호들의 흔적과 박물관,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톨스토이와 체호프의 영지 등을 방문할 예정이며 유명 관광 명소도 둘러본다.

우먼센스에서는 또한 추석 연휴 기간인 10월 2일부터 9일까지 7박 8일의 일정으로 가을 바이칼 여행도 실시한다.

이에 앞서 매달 인문강좌를 열고 있는 우먼센스에서는 6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 문학을 '인문강좌'의 주제로 설정했다.

6월 27일(화, 오후 3시)에는 러시아 문학 전문가이며 서평가인 이현우 한림대 교수가 '러시아 문학의 자취를 찾아서'를 주제로, 7월 18일(화, 오후 3시)에는 이정식 서울문화사 사장이 '러시아 문학의 뿌리, 시베리아'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장소는 용산의 서울문화사 별관(시사저널 빌딩) 강당이며 남녀 누구나 참석할 수 있고 사전 신청하면 수강료는 없다. 인문강좌 문의 및 신청은 우먼센스 편집팀 인문강좌 담당 (02-799-9343)으로, 여행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 BK투어(02-1661-3585)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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