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자료사진

국가는 법으로 교직된 유기체다. 법이 기능을 잃으면 사회는 뼈 없는 액체처럼 흐물거린다. 아노미고 카오스다. 지금 한국사회가 정치와 경제, 사회 등 가장 중요한 체계에서 상당히 그런 상태로 다가갔거나 수렴하고 있다. 정치는 기능적으로 마비됐고, 경제와 사회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를 치유할 국정운영과 정치력은 기력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안의 중요성을 인식했든 못했든, 공적 조직 대신에 사적인 인연을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삼은 것이 사태의 분명한 진앙지였다. 저명한 정치학자 헤럴드 라스키가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공적이지 않은 권력행사는 필연코 사술과 증오, 파당을 낳는다”고 했음은 정치의 금과옥조이지 않는가.

최순실 게이트는 암세포가 너무 넓고 깊게 퍼져 있어서 현재 진행 중인 검찰의 수사로 쉽게 일단락되지는 않을성 싶다. 16일께로 예정된 대통령 조사가 하나의 주요한 분수령이 되겠지만, 여야는 별도의 특별검사법안과 국회 국정조사에도 합의했다.

박 대통령은 조사 결과와는 관계없이 거취문제를 포함해서 난국을 타개할 선언을 내놓도록 압박을 받고 있다. 자진 하야와 탄핵, 시한부 후퇴와 조기 대선, 국회 추천 총리와 거국내각에 권한 이양 등의 요구에 직면해 있으나, 그동안의 정치행태로 보아서는 하야와 완전 후퇴를 선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15일로 예정됐던 추미혜 민주당 대표와의 회동도 결국 무산됐다.

추 대표와의 양자회담이 예정대로 열렸다면 대통령은 1.다시 사과를 하면서 2.여야가 합의한 총리에게 권한을 대폭 이양하겠고 3.국회가 헌법개정 등 정치일정을 마련하면 존중하겠으며 4.새누리당도 탈당해 정치에서는 손을 떼겠다는 입장을 표명하리라는 시나리오가 유력했다. 물론 야당 내의 강경파와 급진적인 민주노총, 시민단체들의 저항은 이에 싹 잠재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대통령 자신과 주변세력은 물론 회복할 수 없는 정치적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더 엄중한 일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제와 외교, 사회는 곳곳에서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상흔이 깊을 것이라는 점이다. 대통령제와 의회주의 등 정치의 기본 구조는 이번 사태로 움츠려져서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이고, 시위정치는 거리의 답답한 체증과 소란을 오래 이어갈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국세는 위축되고, 성장의 기세도 약화될 것이다.

하야 정국으로 들어가면 60일 이내에, 또는 일정한 연장 후의 시기에 대선을 치르게 되는데, 운동장이 기운 상태에서 정권이 창출됨으로써 한국사회의 특성인 보수와 진보로 나뉜 균형이 깨지고 만다. 그런 정치일정은 모든 정책에 대한 국민의 건강한 선택에 기여하지 못하는 만큼 큰 후유증이 예상되며, 그것은 불안한 정국과 차기정권의 부담으로 이어질 것이다.

무슨 이유가 있든 간에 정치권은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당략이나 개별 잇속을 떠나서 난국의 수습을 위해서 협의해야 한다. 단발적인 언론 플레이만 하지 말고 자꾸 만나서 계속 논의하고 협상하라는 것이 국민이 위임한 권리이자 의무다. 입장이 다르다고 모임조차 거부하는 것은 아전인수와 유아독존의 발상이지 정치의 기본에 부합하지 않는다. 

일부 인사들은 국가의 사정과 미래를 사려 깊게 숙고하지 않고 대중에 영합하거나 선동하는 행태를 보여 빈축을 산다. 그렇게 해서 인기가 오르고 표가 모아질지 모르나 국민의 이성과 역사는 매우 높은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라스키는 “민주주의적인 이성이 역사에 구현되어야 진정한 현실이 된다”고 설파했다.

대중민주주의와 시위문화는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참여 방식이다. 주권재민이며, 국민의 의사전달이 가장 집약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1·12광화문 집회는 나름의 정치적 의미가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민중의 의사가 반영되는 게 맞다. 그러나 대중집회는 의사 전달이 불가능하거나, 철옹성을 뛰어넘어야 하는 불가피할 때에만 진가를 발휘한다. 그 자체가 공공성이 아닌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남용되면 사회적인 폐해만 주게 된다.

대중은 때로 감성적이고, 돌발성을 지니고 있다. 이번 광화문 집회는 과격한 단체의 동원 등으로 조직됐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평화적으로 이뤄졌고, 범법과 충돌을 자제해서 매우 다행이다. 다만 내자동에서 일부 과격한 측이 경찰을 무시하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인정된 시간을 넘기고 제한된 지역을 넘어 청와대로 전진하려던 시도는 그 휘발성으로 국민들의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대중도 공중처럼 즉흥적이기보다 사려 깊게 행동해야 공동체가 순리대로 성숙하게 돌아가고 발전할 것이다.

과격한 세력에 휘둘려 극단적인 구호의 앞장을 서거나, 특정 단체나 정당이 작위적으로 조직하거나 선동한 시위는 순수한 민의도 아니고, 전체국민을 대표할 수도 없다. 시위를 지켜본 더 큰 다수의 공감과 우려가 동시에 지켜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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