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설립…"여성 고위임원 늘면 기업가치·투명성 동반 상승"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공동대표를 맡은 한경희 ㈜한경희생활과학 대표.

한경희(53) 대표 사무실에 들어가니 벽에 붙은 큼지막한 세계사 연표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양쪽 벽을 차지하고 있었다. 

궁금해서 물었더니 “사실 내용은 하나도 모른다(웃음). 과거는 미래의 디딤돌이죠. 초심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항상 과거를 기억하고 초심에서 의사결정을 하자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달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생활가전 전문업체인 ㈜한경희생활과학의 영문 브랜드는 HAAN으로 조금 유별나다. 원래 발음대로라면 HAN이 맞다.

한 대표는 “HAN이 브랜드로는 이쁘지 않아 처음에는 HAHN를 사용했다. 그런데 미국 마케팅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HAAN으로 최종 귀결이 됐다”며 “중간에 더블 에이가 버티고 있어 안정감을 준다는 반응이다”고 귀뜀했다.

한 대표는 올해들어 대외적인 명함이 하나 더 생겼다. 지난달 초 출범한 세계여성이사협회(WCD:Women Corporate Directors) 한국지부의 공동대표가 그 것이다.

WCD는 코카콜라, P&G, JP모건 등 글로벌 상장기업을 포함해 각국 기업 이사회에서 활동하는 여성 리더들의 모임이다. 3500여명의 회원이 전 세계 70여개국 1만여개 기업의 이사회에 포진해있다.등기이사(시내이사+사외이사)가 가입 대상인데 한 사람이 여러 기업의 사외이사를 겸직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회원국 중 일본과 한국에만 지부가 없다가 3년 전 일본에 생겼고 OECD 국가 중 마지막으로 한국지부가 문을 열었다.

산파역을 맡은 이는 손병옥(64) 푸르덴셜생명 회장과 한경희 한경희생활과학 대표다.

이화여대 13년 선후배 사이인 두 경영인은 등기이사는 고사하고 일반 여성임원도 손으로 꼽아야하는 한국 기업 환경을 바꿔보자며 1년 전 의기투합했다.

초대 공동대표의 한 축인 한 대표는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많을수록 기업의 재무 성과가 좋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며 “여성에게 임원이나 이사직을 무조건 주자는 것이아니다. 여성 자원을 잘 활용해 기업과 국가 발전을 가속화하자는 취지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김영란법 시행과 관련해 "여성 기업이 가장 취약한 것이 술 접대로 대변되는 네트워크인데 법 시행으로 여성 기업들이 일하기 쉬운 환경이 됐다. 실력으로 승부할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WCD는 어떤 단체인가.

"WCD는 글로벌 유일의 여성 이사들로 구성된 비즈니스 리더 커뮤니티다.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속해있는 여성들이 참여하는 단체다. 회원은 전 세계 굴지의 기업들의 회장(Chairman), 최고경영자(CEO), 최고책임자(COO) 등 C 레벨의 경영진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평균 3~4개 기업의 사내외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코카콜라, 휴렛팩커드(HP), P&G, JP모건 등 시가총액 1경에 달하는 1만여 개 기업의 이사진들이 멤버다. 1경이라면 경제규모로 볼 때 미국, 중국 다음이다. 그런 막강한 조직이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손실이다. 개발도상국인 몽고와 나이지리아에도 진작부터 지부가 있었는데 말이다."

-이사회 = 임원으로 보면 되나.

"다들 혼돈하시는데 이사회와 임원은 다른 개념이다. 임원은 이사, 상무, 전무 등 회사 내 직함이고 이사회는 등기이사로 구성된 조직이다. 이사회는 사내이사와 사외이사가 포함된다. 사내이사에는 대표이사와 CFO(재무최고책임자) 등이 있다. 임원도 등기이사가 아니면 WCD 회원이 될 수 없다."

-지부 설립 이유는.

"이사회가 우리나라에는 도입된지 얼마 안되지만 서구에서는 기업 의사결정의 최고 정점에 있는 조직이다. 중장기적인 전략 방향을 결정하는 컨트롤타워로 전문경영인 시스템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재벌 시스템이다보니 구조조정본부와 전략기획실 등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 기업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야하며 여성이 이사회에 다수 참여하면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설립하게 됐다."

-지부 회원 구성은.

"나와 손병옥 회장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이사진 12명, 감사 2명, 총무 1명, 그 외 회원으로 구성돼 있다. 임수경 한전KDN 대표, 이수영 코오롱워터앤에너지 대표, 김주연 한국 P&G 대표, 모진 풀무원다논 대표 등 국내 유명 기업의 이사회 여성 이사 40여명이 주요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지부의 역할 및 활동 계획은.

"우리나라는 이사회라는 제도에 대해 그리 잘 알고 있지 않다. 능력있는 여성들도 시스템을 모르니 리더로서 활약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지부는 여성들이 기업이나 공직 등 다양한 분야의 고위직으로 많이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여성인력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직장여성들에게 고위직까지 오르려는 동기를 부여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다."

-우리 사회의 '유리천장(직장내 여성차별)'이 어느정도 견고한가.

"지난해 기준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 713곳의 등기임원 4529명 중 여성은 94명으로 이사회 내 여성 비율은 2% 남짓이다. 여기엔 오너 가족 출신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직장생활 밑바닥부터 올라온 여성 이사는 1% 미만이다. 한국지부는 여성 리더가 전무한 국내에 여성 리더의 비율을 확대하고 육성함으로서 공기업과 상장 회사에 30% 이상의 여성 이사회 임원 비율을 달성하려고 한다."

-기준점이 하필 30%인가.

"30%라는게 여성계에서는 하나의 지표가 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할당제는 30%를 목표로 하더라. 실증적인 데이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나. 이사회에 여성이 한명 있을때는 큰 목소리를 못내지만 30% 이상되면 무언가 역할을 할 수 있다."

-여성 30%를 사외이사로 채우는 꼼수가 나올 수 있다.

"물론 해당 기관에 사내이사를 시킬만한 여성이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마지못해 30% 여성 몫을 사외이사로 구색을 맞출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이사회에 여성 이사가 30%가 되면 당연히 여성 임원들도 많아지게 돼 있다. 여성 이사 30% 의무 규정 적용을 받는 기관은 여성 임원 육성에 대한 관심에 가질 수밖에 없다."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왜 중요한가.

"1962년에 설립된 비영리단체 카탈리스트가 2004년부터 연구해온 자료에 따르면 여성 이사나 임원 비율이 높을수록 기업의 재무 성과가 좋다고 한다. 미국 경제잡지인 포천이 선정한 200대 기업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세계적인 기업은 여성 임원 비율이 최고 30~40%에 달한다. 여성 고위 임원의 존재는 기업 가치와 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는 고위직에 진출하는 여성이 너무 없는데 비전을 보여주고 경험과 용기를 주면 아래에서도 더 잘 성장할 것이다. 여성들이 현안을 좀더 세세히 꼼꼼히 보고 남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부분들을 집어내는 능력이 있다."

▲한경희 대표가 회사 입간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손병옥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공동대표와 함께 있는 한경희 대표.

한경희 대표는 원래 5급 공무원이었다. 해외에서 학위를 받고 일정 기간 외국에 체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제고시(지금은 폐지됐다)에 합격해 공직 생활을 만 3년 거쳤다.

직장과 가사 노동을 병행하던 중 아이디어를 얻어 스팀청소기와 스팀다리미를 개발해 공전의 히트를 친 뒤 대기업급 생활가전 업체를 일궈냈다. ‘스팀청소기의 신화’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안정된 공무원 생활을 박차고 나온 계기는.

"당시 맞벌이 주부였는데 아무래도 가사 일은 여자가 많이 하게 되더라. 제일 힘든 게 무릎 꿇고 걸레로 청소하는 거였다. 거의 모든 가전제품들이 서양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개발이 되는데 온돌문화인 우리나라에 딱 맞는 청소기가 없더라. 로켓도 쏘아올리는 세상인데 이까짓 청소기쯤 못 만들겠냐는 생각에 창업을 했다. 정말 무모하게, 무식하니깐 용감하게 도전했는데 굉장히 힘들었다."

-어떤 점이 어려웠나.

"사업 초기 가전회사의 여성 사장이라는 이유로 오해를 많이 받았다. 스팀 청소기를 들고 유통업체를 돌았지만 담당자들이 대부분 남자이다 보니 제품 자체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진공청소기가 좋은데 스팀청소기를 누가 사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정부에 중소기업 지원프로그램 지원 신청서를 내러 갔을 때는 “남편은 어디 가고 바지사장이 왔느냐”는 소리도 들었다. '세상에 없던 제품'을 만들겠다고 나섰지만 곧 비슷한 상품들이 우후죽순 쏟아지기도 했다."

-여성기업인에게 김영란법이 어떻게 다가오나.

"여성 기업이 가장 취약한 것이 네트워크다. 어차피 여성들은 술 못먹고 실력으로 승부할 수 밖에 없는데, 김영란법으로 여성 기업들이 일하기 쉽게 됐다. 여성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이 됐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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