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설자의 보이차 시음기]
산은 산, 물은 물, 보이차는 보이차이다
‘부지기수, 천변만화, 오리무중, 무궁무진’
왜 마시는 사람마다 다른 맛일까?
주말이나 휴일이면 아내와 동네 뒷산을 오릅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뒷산으로 취급받지만 승학산이라고 하면 부산에서는 봄 철쭉, 가을 억새로 유명세를 가진 산이랍니다. 가벼운 복장으로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산이지만 등산화를 신고 올라야 하는 코스도 있답니다. 임도를 따라 걸으면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아이들도 산책하듯 오를 수 있고, 경사진 길을 선택하면 등산하는 마음가짐으로 산을 타야 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성철 스님의 법구를 생각해 봅니다. 산은 산이지 물이 아니지 않은가? 물도 마찬가지인데 당연한 말인데 성철 스님이 말해서 다들 굉장하다고 받아들였던 것일까요? 그런데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로다’라고 말해서 또 파장을 일으켰지요. 그런데 결국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평상심의 경지이고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로다”라고 하는 건 혼란과 전환의 경지이며,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 하여 모든 것이 평상심으로 회복되는 경지라고 합니다. 낮은 산이라고 우습게 여겨 조심하지 않으면 큰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높고 낮다는 경계가 따로 없는데 산을 자신의 척도로 높낮이를 정하는 게 문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운전을 배우면서 주행 연습을 할 때 있었던 일화입니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공단 도로에서 교습받았는데 한 블록만 몇 시간씩 뱅뱅 돌 듯이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계속 가고 서기를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무 지겨운 나머지 강사에게 큰길로 나가면 안 되느냐고 불평했습니다. 강사가 제게 말하기를 ‘세상의 길이 다르지 않으니 여기에서 운전을 잘하면 어느 길에서도 잘할 수 있답니다.’
이제부터 연재할 보이차 시음기의 프롤로그가 뚱딴지같은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는 듯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길은 길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보이차는 보이차다’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보이차는 마시는 음료로서 차일 뿐이라면 구태여 연재 글로 쓸거리가 되지 못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이차는 ‘부지기수, 천변만화, 오리무중, 무궁무진’이라 표현할 만큼 실체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으니 ‘보이차가 아닌 보이차’를 마시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보이차를 마시는 단계를 셋으로 나누어 산을 오르는 것에 비유해 봅니다. 산에 들면 산자락에서 시작하게 되는데 어느 산이나 다를 게 별로 없어 앞만 보고 묵묵히 걷게 됩니다. 숲에 안기면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와 계곡 사이를 흐르는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산을 오릅니다. 산의 7부 능선 정도 올라 산등성이에 이르면 산 아래가 내려다보이면서 얼마만큼 올랐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산등성이에서는 정상까지 가야 할 길도 가늠이 되고 올라왔던 길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가파른 경사가 있기 마련인데 깔딱고개라고 하지요.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급해지니 체력이 떨어진 사람은 걸음이 더뎌지는 길입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누구나 다다를 수 있는 정상은 비어 있고 건너편에 있는 봉우리를 보게 됩니다.

보이차 생활을 시작하는 단계는 산자락과 같아서 여느 산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이 차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숙차와 생차 중 내 취향에 맞는 차가 정해지고 차 구입에 몰두하는 단계는 산등성이까지 계속됩니다. 무작정 보이차라면 다 받아들이다 내 입맛에 맞는 차를 알게 되면서 자신의 차 생활을 돌아보는 때가 오게 됩니다. 너무 많은 차를 가지고 있는 걸 반성하면서도 차 구입을 멈추지 못하는 상태를 산등성이라고 보면 될까요?
산등성이는 산 높이의 7부 정도이니 이제 3부만 오르면 되는데 배낭은 점점 무거워지고 걸음은 더디어집니다. 보이차 생활의 2단계를 벗어나야 정상에 오르면 볼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텐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은 체력도 강해야 하지만 왜 배낭을 가볍게 꾸려야 하는지 압니다. 보이차 생활의 3단계는 그동안 마신 차를 잊어야 하는데 정상의 향미가 지미무미(至味無味)이기 때문입니다.
산에 오르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산과 산에 들어 밋밋한 길 주변만 보고 걷는 산, 산등성이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정상을 올려다볼 수 있는 산과 정상에 서서 보는 산은 같지만 다르지 않겠습니까? 한 가지 보이차를 마시더라도 마시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다른 차를 마시는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연재 글로 만나게 될 보이차 시음기는 아마도 산등성이를 지난 정도에서 마시는 정도의 내용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지난번 연재글 ‘무설자의 보이차 이야기’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이었다면 ‘무설자의 보이차 시음기’는 다소 전문성이 있는 내용이어서 글을 쓰는 데 부담이 됩니다. 보이차를 먼 산 보듯 바라보는 분들을 독자로 모시기는 어렵겠지만 산자락에서 산등성이로 나아가듯 보이차를 마시고 있는 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20년 가까이 꾸준하게 마시면서 체득하고 음미하게 된 보이차의 향미를 독자분들과 나눌 수 있는 글로 쓸 수 있길 소망합니다.
무 설 자
여성경제신문 김정관 건축사·도반건축사사무소 대표 kahn77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