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청 탑골공원 장기판 철거
“여가 공간 사라졌다” 지적 이면엔
깨끗해지고 질서 잡혔다는 호평도
복지활동가 안부 살피며 빈자리 메워

2일 여성경제신문이 찾은 탑골공원 /김정수 기자
2일 여성경제신문이 찾은 탑골공원 /김정수 기자

탑골공원 앞 벤치가 조용하다. 시끄럽던 말소리와 장기알 부딪히던 소리는 사라지고 바람만 공원을 가로질렀다. 매일 자리를 차지하던 노인들은 흩어졌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적막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편안하고 깨끗해진 공원, 누군가에게는 오랜 낙이 사라진 하루다.

2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여성경제신문이 팔각정 앞에서 만난 70대 김모 씨는 “맨날 싸우고 욕하고 민원도 많았는데 요즘은 정말 조용하다”며 “원래 장기를 두지 않아 지금이 좋다”고 말했다. 반면 인근에 있던 80대 이모 씨는 “여기 나와 장기판 구경하는 게 하루 낙이었는데 이제 말 붙일 사람도 없다. 허전하다”고 했다.

종로구청은 지난 7월 말부터 탑골공원에서 바둑·장기 등 오락 행위를 전면 금지했다. 공원 담벼락 앞에 늘어서 있던 장기판 등도 일제히 철거됐다. 3·1운동 발상지인 탑골공원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전까지는 내기·음주 장기, 노상 방뇨, 쓰레기 투기 등이 빈번해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이후 공원은 한층 깨끗해졌지만 그만큼 노인들의 관계망은 느슨해졌다.

안국역 인근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파견된 ‘탑골복지활동가’들이 매일 공원 내 어르신들 안부를 살핀다. 공원 입구에는 복지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팸플릿과 컨테이너 사무실이 마련돼 있다. /김정수 기자
안국역 인근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파견된 ‘탑골복지활동가’들이 매일 공원 내 어르신들 안부를 살핀다. 공원 입구에는 복지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팸플릿과 컨테이너 사무실이 마련돼 있다. /김정수 기자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빨간 조끼를 입은 복지활동가다. 이들은 매일 탑골공원 일대를 돌며 어르신들의 안부를 살피고 있다. 안국역 인근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파견된 ‘탑골복지활동가’다. 공원 입구에는 복지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팸플릿과 컨테이너 사무실이 마련돼 있다.

서울노인복지센터는 장기판 철거 이후 공원에서 머물던 어르신들을 수용하기 위해 분관 2층에 약 250석 규모의 장기실을 마련했다. 현재 등록 회원은 3000명을 넘지만 상시 이용 인원은 그보다 적다. 7월부터 상담 자격증 등을 갖춘 활동가 22명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3교대로 현장에 파견되고 있다. 여가 지원뿐 아니라 구별 복지 혜택 안내, 장기 미방문 회원 안부 전화 등도 맡는다. 현장에서 거주지를 확인해 지자체별 복지수당이나 교통비 지원을 안내하며 ‘현장 상담사’ 역할을 수행한다.

/김정수 기자
공원 앞에는 서울노인복지센터 분관 바둑장기실 등 다양한 복지 정보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김정수 기자

탑골복지활동가 이영란 씨(가명·여·73)는 “탑골공원 장기판이 있던 자리를 정비하면서 복지관이 장기판 약 250석을 그대로 흡수해 운영 중”이라며 “이후 공원에 오던 어르신들이 장기 두러 왔다가 복지관의 여러 혜택을 알게 되고 회원 등록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 시민만 회원 등록이 가능하지만 지방에서 온 어르신들도 어려움을 듣고 전화로 안부를 챙기고 있다”며 “혼자 계신 분들은 쉽게 말을 안 꺼내기 때문에 활동가들이 먼저 말을 걸고 정을 쌓으며 관계를 이어간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장기판이 있던 시절엔 싸움·음주·야바위 등으로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며 “지방에서 올라온 어르신도 ‘예전엔 더러워서 들르길 꺼렸지만 지금은 깨끗해져서 좋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실제로 “텃세를 부리거나 돈을 뜯는 야바위꾼도 많았다”고 토로하며 철거를 반기는 어르신도 적지 않다고 했다.

2일 여성경제신문이 찾은 탑골공원에서 한 노인이 신문을 읽고 있다. /김정수 기자
2일 여성경제신문이 찾은 탑골공원에서 한 노인이 신문을 읽고 있다. /김정수 기자

하지만 이곳에서 여가 활동을 즐기던 모든 어르신이 복지관으로 흡수된 것은 아니다. 이씨는 “거리 생활에 익숙한 분들은 복지관 안으로 들어오길 꺼리고 실내보다 공원 같은 열린 공간을 더 편하게 느끼는 분들도 있다”고 했다. 일부 상인들은 전통이 사라졌다고 반발하지만 그는 “탑골공원은 3·1운동의 발상지로서 본래 의미가 지켜져야 한다”고 했다.

복지센터가 공휴일에는 문을 닫는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10월 3일과 6~9일이 휴관일이다. 긴 연휴 기간 동안 활동가 순회도 중단돼 일부 어르신들이 고립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시민들이 쉬고 있다. /김정수 기자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시민들이 쉬고 있다. /김정수 기자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여성경제신문에 “장기판 금지는 일부의 부정적 행태가 노인 전체의 모습으로 비치던 문제를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며 “공원이 깨끗해지고 노인 세대의 이미지가 개선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자율적인 여가 공간이 줄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탑골공원이 노인 여가의 전부는 아니다. 단지 그렇게 비쳤을 뿐”이라고 했다. 다만 “복지관 이용에도 회원 등록 등 절차가 복잡해 접근이 쉽지 않다”며 “유예기간을 두는 등 등록 장벽을 낮춰 더 많은 어르신이 자연스럽게 유입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종로구는 탑골공원 인근 약 200m 거리의 실내 문화공간을 활용해 기존보다 두 배 많은 24개의 장기판을 설치하는 방안을 서울시와 협의 중이다.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내년 1월 개관을 목표로 하며 서울 시민이 아니어도 이용할 수 있는 개방형 시설로 운영하는 방향이 논의되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김정수 기자 essence@seoulmedia.co.kr

저작권자 © 여성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