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역사상 가장 크게 영토 넓힌 정복 군주
담덕의 리더십은 현대에서 더욱 필요로 해
기획-탈고 20년···작품 위해 대학원 진학도

1600년 전 고구려의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그린 엄광용 작가의 대하소설 <광개토태왕 담덕>이 10권으로 완간됐다. 

광개토태왕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크게 영토를 넓힌 왕으로서 서북으로는 후연과 거란을 공격해 요동반도와 만주를 정복했으며, 북동으로는 동부여를 겁박하여 부용국으로 삼았다. 또한 남으로는 백제의 관미성(강화도 교동 비정)을 공략해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고, 이어서 백제의 도성 한성을 쳐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때부터 한수 이북이 완전히 고구려 땅으로 영입되었다. 

광개토태왕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크게 영토를 넓힌 왕이었다. 대하소설 <광개토태왕 담덕> 작가 엄광용 /사진=새움출판사
광개토태왕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크게 영토를 넓힌 왕이었다. 대하소설 <광개토태왕 담덕> 작가 엄광용 /사진=새움출판사

그뿐만 아니라 왜군의 군대 5만이 백제·가야와 연합군을 결성해 신라를 공격할 때 고구려 원정군 5만을 파견해 신라 군사들과 함께 협공해 일격에 물리쳤다. 당시 동북아의 패권을 차지한 왕이 바로 광개토태왕이다.

엄광용 작가는 기왕에 나온 광개토태왕 관련 창작물들의 스토리 자체가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데도 독자가 그것을 역사로 인식하게 되는 점이 우려스러워 정사를 다룬 광개토태왕 소설의 집필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엄 작가에게서 <광개토태왕 담덕>의 집필과 완간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광개토태왕 담덕> 완간을 축하한다. 탈고한 소감을 간단히 말한다면.

“실로 먼 길을 달려왔다. 마지막 10권을 마무리하고 나서 ‘끝’ 자를 썼을 때도 말을 타고 계속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말(馬) 위에서 생의 절반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담덕처럼, ‘소설’이라는 말(言)을 이끌고 주인공과 함께 호흡하며 긴 여정을 달려왔다고 생각한다. 1600년 저쪽의 역사를 현재화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제1권에서 5권까지 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소설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거의 쉬지 않고 달렸다는 기분이 든다. 큰 산을 힘겹게 넘어 내리막길을 달리듯 그렇게 빠른 속도감을 느꼈다. 소설을 쓰면서 마치 마라토너의 ‘러너스 하이(장시간 유산소 운동 중에 나타나는 황홀감)’와도 같은 기분에 휩싸일 때도 많았다. 그래서일까, 대하소설을 마치고 나서도 나는 계속 ‘소설’이라는 말에 채찍질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출판사에서 넘어온 마지막 교정을 다 보고 나서야 비로소 달리는 말에서 내린 기분이 들면서 갑자기 허탈감이 찾아왔다. 광개토태왕이 탄 말(馬)과 내가 이끌고 온 말(言)은 중의적인 표현이지만, 어쩌면 한 호흡을 하면서 달려왔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담덕의 서른아홉 생애가 너무 짧았다는 것, 그래서 아쉬움이 큰 바람에 더욱 그런 허탈감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대에 왜 1600년 전 인물인 광개토태왕인가.

“역사는 반복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가 정의한 ‘도전과 응전 원리’가 그 반복 작용에 의해 역사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도전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응전이 있는데, 잘못 응전하면 역사가 후퇴하고 제대로 응전하면 크게 비약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를 둘러싼 도저한 이웃 나라들의 공격에 과감하게 응전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위대한 군주였다. 

지금 21세기의 우리나라 현실도 정치적 역학관계를 따질 때 중국·러시아·일본·미국 등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 광개토태왕이 태어나기 직전의 고구려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더구나 지금의 우리는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같은 민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으니 그 위험성은 고구려보다 더 악조건에 놓여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광개토태왕의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고 생각해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

엄광용 작가는 소설 <광개토태왕 담덕>을 쓰기 위해 사학과가 있는 대학원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수료했다고 한다. /사진=새움출판사
엄광용 작가는 소설 <광개토태왕 담덕>을 쓰기 위해 사학과가 있는 대학원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수료했다고 한다. /사진=새움출판사

—기획에서 탈고까지 20여 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린 까닭은.

“우리나라 역사서로 가장 오래된 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그러나 편저자인 김부식의 사대주의 사상이 고구려본기의 내용을 대체로 소략하게 다루었고, 특히 지안(輯安)에서 발견된 광개토태왕 능비의 금석문에 비하면 너무 약식으로 서술하는 데 그쳤다. 역사 자료를 찾는 데는 한계가 있고, 당시의 생활이나 문화를 알 수 있는 간접 자료를 확보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또한 전쟁 상황을 그리려면 그 지역의 지리가 아주 중요하므로 답사 여행에도 긴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주로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만주를 비롯해 백두산·요하 등등의 지역을 답사했는데 중국만 다섯 번, 일본의 경우 대마도를 비롯해 세 번, 그리고 저 멀리 서쪽의 실크로드까지 두루 돌았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가 고대사를 공부했다고 하는데.

“처음 이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은 것은 고구려연구회를 따라 국내 고구려 유적 답사 여행을 다니면서부터였는데 중국 만주 지역 답사를 다녀오면서 본격적으로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고구려 도성인 국내성 유적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중국인들은 그 성터에 아파트 단지를 짓고 성벽의 돌을 허물어 단지의 경계를 표시하는 담으로 쌓았다. 

그때 문득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불끈하고 올라오는 분개심이 일었다. 이민족이지만 이웃 나라의 역사 유적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가 싶은 생각에 반드시 고구려 역사가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 시절 중국은 고구려 역사까지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동북공정을 실행하고 있었다. 

해외 답사를 다녀온 후 나는 그냥 자료 조사를 하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소설로 고구려 역사를 복원하기 힘들다고 생각해 제대로 고대사를 공부하고 싶어 단국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이미 그때 50대의 나이였지만 젊은 대학원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들에게서 자료 조사 방법도 배웠고, 나 나름대로 역사 인식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다.” 

—수많은 전란으로 고구려에 관한 사료들이 대부분 소실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주로 참고한 사료가 있다면.

“광개토태왕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나와 있는 것은 능비의 금석문이다. 그 외의 국내 자료로는 앞에서 언급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삼국사기>가 역사의 뼈대라면 <삼국유사>는 그것에 살을 붙인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생활상을 알려면 반드시 <삼국유사>를 깊이 있게 읽어야 한다. 외국 사료로는 중국의 고대사를 다룬 각종 사료들, 그리고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를 많이 참고했다.” 

—담덕은 한마디로 어떤 인물이었나?

“우리는 ‘광개토태왕’이라는 왕호처럼 ‘가장 땅을 많이 확장한 군주’로 알고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시대를 명확하게 읽고, 그에 대처할 줄 아는 훌륭한 리더’였다. 당시에는 농경시대이므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땅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는 무역을 통한 국가 경제력이 부국의 요체가 되면서 경제 영토를 어떻게 넓혀나가느냐가 새로운 관건으로 떠올랐다. 

담덕은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강한 나라는 더욱 강력하게 압박하고, 약한 나라는 겁을 주어 종속시키거나 선린외교로 감싸안아 우호국으로 만드는 다양한 전략을 펼쳤다. 그것을 등거리 외교라고 한다.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할 때 정치적으로도 담덕의 외교술에서 배울 점이 많고, 경제적으로도 그 리더십을 십분 활용하여 다양한 나라에 공장을 건설하여 ‘경제 영토’를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줄거리와 특징을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소설은 광개토태왕 담덕이 태어나기 전인 고국원왕 말년부터 시작된다. 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기에 처했던 시기였다. 담덕은 어린 시절부터 고구려가 강력한 적성국들에 수시로 도전을 받은 데 대한 응전이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고, 그래서 정복 군주의 꿈을 키워나갔다. 

소설의 전 과정은 주인공 담덕이 성장해서 고구려를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드는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전쟁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나는 되도록 독자들이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읽을 수 있도록 자연 묘사나 주인공들의 행위를 디테일하게 그리려고 노력했다. 요즘 소설에서 점차 스토리가 사라지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해 대하소설을 쓰게 되었고 그래서 특히 긴박감 있는 장면 묘사를 통하여 스토리의 중요성을 부각하고자 했다.”

엄광용 작가는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할 때 정치적으로도 담덕의 외교술에서 배울 점이 많고, 경제적으로도 그 리더십을 십분 활용하여 다양한 나라에 공장을 건설하여 ‘경제 영토’를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광개토태왕 담덕'이 진열된 서점에서 포즈를 취한 작가 /사진=새움출판사
엄광용 작가는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할 때 정치적으로도 담덕의 외교술에서 배울 점이 많고, 경제적으로도 그 리더십을 십분 활용하여 다양한 나라에 공장을 건설하여 ‘경제 영토’를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광개토태왕 담덕'이 진열된 서점에서 포즈를 취한 작가 /사진=새움출판사

—끝으로 약력을 간단하게 소개해 달라.

“1990년 문예지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벽 속의 새’가 당선되어 37세의 늦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소설가의 꿈을 키웠으나 졸업 후 잡지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소설을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들어서면서 다시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이 40세 때 12년간 잡지기자 생활을 접고 전업 작가가 되었고, 그 이후 처음 쓴 소설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다룬 <사냥꾼들>이란 역사소설이었다. 기자 생활을 할 때부터 자료 조사를 해서 퇴직 후 마음먹고 써본 소설인데 겨우 초판에서 끝나 먹고살기가 막막해졌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기업체 역사를 쓰는 사사(社史)였는데, 그 일을 하다 보니 소설 쓸 시간을 많이 빼앗겼다. 

소설가로서 문단 활동을 하려면 중단편을 많이 발표해 문단의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나는 2002년에 나온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1권밖에 출간하지 못했다. 그래서 기왕에 전업 작가로 나선 입장이니 대하소설을 써서 나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대하소설을 쓰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와 <천년의 비밀>을 출간했고 2015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광개토태왕 담덕> 집필에 들어갔다. 5권까지 썼을 때 출판사와 계약해 2022년 7월 1, 2권을 출간하는 것을 시작으로 4~5개월에 한 권씩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최종 완간을 한 것은 2025년 2월 말이었다. 

나는 15년 동안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제는 이미 고인이 되신 정수일 소장님의 대표 저서 <실크로드 사전>의 편집을 도왔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앞으로 대하소설 <실크로드>도 써볼 생각이다. 지금 제1권 ‘종이의 교류’ 초고를 써놓은 상태인데, ‘비단의 교류’, ‘말의 교류’, ‘옥의 교류’, ‘도자기의 교류’ 등등 주제별로 총 10권을 기획해 차례로 써나갈 계획이다.”

여성경제신문 백영건 기자 younghon93@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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