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값 내렸더니 비급여 약만 늘었다"
제약사 매출 감소 → 신약 개발 위축
건보재정 절감? "국민 부담 커졌다"

지난 2011년 8월 서울 서초구 방배동 제약회관에서 열린 '비상식적 약가인하 규탄대회'에서 제약업계 관계자들이 정부의 약가인하 방침에 반대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11년 8월 서울 서초구 방배동 제약회관에서 열린 '비상식적 약가인하 규탄대회'에서 제약업계 관계자들이 정부의 약가인하 방침에 반대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의 한 내과 의원. 60대 김명수(가명·남) 씨는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들고 약국에 들렀다가 황당한 말을 들었다. "이전까지 건강보험이 적용되던 약이 비급여로 바뀌었다"는 것. 김 씨는 몇 년째 같은 약을 복용해 왔는데 갑자기 약값이 수십 퍼센트 올라버렸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약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런 거죠?"

이유는 정부가 추진한 약가 인하 정책 때문이다. 건강보험 재정 절감을 위해 약값을 낮췄지만 결과적으로 제약사들이 비급여 약품 생산을 늘리면서 국민의 부담이 오히려 증가하는 역효과가 발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국회에서 열린 ‘제약·바이오산업 육성 지원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도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이 건강보험 재정 절감을 위한 당초 목표를 달성했는지, 오히려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낳았는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17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정부는 급증하는 건강보험 지출을 통제하기 위해 2012년부터 ‘일괄약가인하 제도’를 시행해왔다.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가 만료되면 복제약(제네릭)까지 포함해 약가를 대폭 낮추는 방식이다. 이 정책은 시행 첫해부터 효과를 발휘했다. 2012년 약품비 지출이 전년 대비 4489억원(3.4%) 감소했고, 총 진료비에서 차지하는 약품비 비율도 2011년 대비 2.08%포인트 줄었다.

문제는 그 이후다. 최근 연세대 최윤정 교수 연구팀이 국내 96개 제약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분석에 따르면 약가 인하 정책이 제약사의 매출 성장 둔화를 초래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연구진은 2012년 정책 시행 이후 2013~2019년까지 약가 인하 정책에 영향을 받은 기업들의 매출이 최소 26%에서 최대 51.2%까지 감소했다고 밝혔다.

제약사들은 생존 전략을 바꿨다. 급여(건강보험 적용) 의약품보다 비급여 의약품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조정했다. 급여 의약품은 정부의 가격 규제를 받지만 비급여 의약품은 비교적 자유로운 가격 책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비자의 직접 부담이 증가하는 ‘풍선효과’가 나타났다.

최 교수는 토론회에서 "매출액 효과 측면에서 봤을 때 일괄약가인하 제도는 장기적인 성장세의 상대적인 둔화가 관찰됐다"라며 "이는 제약기업의 장기적인 성장 및 대형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했다.

약가 인하로 매출이 줄어든 제약사들은 또 다른 대안을 찾았다. 해외 다국적 제약사의 오리지널 의약품을 국내에서 공동 판매하는 ‘코프로모션’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 특히 매출 규모가 큰 제약사일수록 코프로모션 비중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관계자는 “국내 제약사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제품보다 글로벌 제약사의 제품을 도입해 판매하는 쪽이 안정적인 매출 확보에 유리하다”며 “이는 장기적으로 국내 신약 개발 역량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약가 인하 정책의 장기적 영향은 제약사들의 연구개발(R&D) 투자 감소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은 “신약 창출을 위해 R&D 대규모 투자와 전문인력 양성·기술 확보·품질향상 등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라며 “우리 강점인 제네릭과 개량신약에 대한 적정한 보상이 이뤄지고 이를 R&D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생태계가 마련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혁신신약 창출과 건강보험 재정 관리라는 상반될 수 있는 두 목표가 균형을 취할 수 있도록 관련 정책이 잘 조율돼야 한다”라며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책적 조율과 제도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라고 했다.

패널 토론에 나선 김동숙 국립공주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약가 인하 제도의 대상이 된 제품과 기업의 특성이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가격이 낮은 제품이나 수액제도 각기 제품 특성과 가격이 다르다"고 했다. 이어 "해당 연구 기간 이후 보장성을 강화한 정책이 도입됐고 가격이 높은 의약품이 상당수 등재됐다는 점도 살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2007년부터 2022년까지 국내에서 등재된 의약품 2만5000여개를 분석한 결과 최초 등재 가격 대비 현재 약가는 평균 87% 수준으로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최근 들어 약가 정책의 균형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모습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과거에는 재정 절감을 중심으로 정책을 추진했지만 최근에는 신약의 혁신 가치를 인정해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국민건강보험종합계획에 따라 약가 사후 관리 제도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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