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증 없는 한 업무상 발병으로 인정
법률적‧과학적 뒷받침 부족, 신뢰 못해

20일 ‘일자리연대’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모럴해저드 문제는 없는가?’라는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김민 인턴 기자
20일 ‘일자리연대’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모럴해저드 문제는 없는가?’라는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김민 인턴 기자

2017년 도입된 '추정의 원칙'은 근로자의 질병이 업무로 인한 것으로 추정되면 반증이 없는 한 업무상 발병으로 인정하는 규정이다. 그러나 이 원칙이 산재 근로자를 적절히 보호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추정의 원칙이 법률적 규정은 물론 과학적 뒷받침도 부족해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20일 '일자리연대'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모럴해저드 문제는 없는가?'라는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토론회를 통해 2017년 9월 도입된 '추정의 원칙'이 과연 산재 근로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보호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고 산재 제도 전반에 대한 합리적인 보완책을 찾고자 했다.

추정의 원칙은 질병의 진단이 명확하고 업무로 인한 신체 부담 정도를 종사한 직종과 종사 기간으로부터 가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체 부담 정도와 질병과의 상관관계를 예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느 직종에서 몇 년 이상 종사해 특정 질병이 일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추정의 원칙을 적용할 때 산재 인정 여부 결정을 빨리하기 위해 유사한 선례가 있으면 곧바로 인정해 주는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어 비판받고 있다.

김수근 산재심사위원회 위원은 이런 점을 비판하며 추정의 원칙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추정의 원칙을 오래 추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한국에서 적용하고 있는 추정의 원칙은 그것의 법률적‧과학적 취지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산재 처리의 신속성 위주로 도입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질병으로 고통을 받은 근로자들에게 골고루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산재 신청이 많았고 승인율이 높았던 업종과 직종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호 울산대학교 직업환경의학과 연구교수도 추정의 원칙을 도입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을 드러냈다. 그는 "추정의 원칙을 도입한 이유는 업무상 질병을 더 신속하고 넓게 인정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추정의 원칙을 도입하니 처리 기간이 더 늘었다"고 말했다. 또한 김 교수는 "근골격계 질환에 광범위하게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 부작용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추정의 원칙 때문에 일자리 복귀도 늦어졌다. 업무상질병으로 승인받으면 대부분 수술로 이어지게 되는데 수술 후에는 통증 완화를 중심으로 한 물리치료를 주로 받을 뿐, 충분한 운동치료나 재활치료를 받지 못해 근력 및 근육량이 감소하게 되고 이 상태로 복귀할 경우 재발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도 '추정의 원칙'에 대해 '포퓰리즘 입법'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어떤 중요한 규정을 둘 때 법률의 규정을 둬야 하는데 추정의 원칙은 그런 것이 없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어차피 노동조합의 목소리가 큰 곳에서는 노동조합의 의견이 인정되는데 기업이 예방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에 투자할 필요가 있느냐'는 체념의 목소리가 많이 나온다"며 추정의 원칙이 기업 예방 활동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게 만들고 개인의 예방 노력에 대한 의지를 약화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원종욱 연세대학교 예방의학과 교수는 다소 다른 의견을 내놨다. 그는 근골격계 질환 추정의 원칙에 관해 "상병과 직종, 근무 기간, 유효기간을 열거하고 있으며 적정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너무 엄격해서 적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원 교수는 "개인적으로 근골격계 질환은 더 많이 인정돼야 한다"며 "근골격계 질환에 대해서는 인정 기준이나 방법을 더 완화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다만 수술할 필요가 없으며 요양 기간이 1개월 이내인 경우 또는 취업 중 치료가 가능한 경우는 간단한 조사와 직업환경의학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쉽게 인정해 주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근로자 주의 의무 넣어야
산재보험 제도 개선 요구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모럴해저드 문제는 없는가?’ 정책토론회 현장 /일자리연대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모럴해저드 문제는 없는가?’ 정책토론회 현장 /일자리연대

이날 토론회에서는 '추정의 원칙'뿐만 아니라 산재 제도 전반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김준용 국민노동조합 사무총장은 한국의 산재 제도 전반에 관해 "산재를 비롯한 중대재해 문제를 상대방을 향한 공격 수단 혹은 악마화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강압적 근거, 문명적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산재의 무과실 책임주의에 일정 정도 근로자의 주의 의무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우택 한국경영자총협회 안전보건본부장은 "산재보험 재정이 허락하는 한계 내에서 본 제도를 꾸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임 본부장은 "다른 보험 영역에서 균형성 있게 아픈 근로자들을 지원해 주거나 휴업급여를 주는 등의 발전이 필요하다. 모든 부분에서 산재보험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조금 고칠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그는 "현재 한국의 제도는 보상에 매몰돼 있으며 보상과 예방이 전혀 연계가 되어 있지 않다. 재해조사나 역학조사도 안 하고 보장은 신속하게 하니 정책적으로 엇박자가 좀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임 본부장은 산재보험 제도 개선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 좋겠다며 토론을 마무리했다.

이번 정책토론회엔 이채필 일자리연대 상임대표, 좌장으로 강대희 서울대학교 의대 교수, 기조 발제엔 김수근 산재심사위원회 위원을 비롯해 학계의 인사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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